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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85학번이다. 중앙대 동문으로서 최근 모교에서 벌어진 학과 구조조정 사태를 지켜보면서 작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른바 ‘학사 구조 선진화 계획’이란 이름으로 발표된 안은 결국 취업 잘되는 학과만을 남기겠다는 낡고 낮은 수준의 기업주의 발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대학 측은 이번 구조조정안이 “사회가 요구하는 융·복합형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학과의 벽을 허물고 단과대학 단위로 전공을 운영하는 학사 제도”라고 했지만, 궁극의 목표는 경쟁력 없는 학과를 폐지하는 데 있다. 전공선택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대학 정원을 줄이기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그것은 학문 간 불균형을 초래하고, 학점 경쟁을 부추겨 균형 있는 신체를 포기한 채 한쪽만 비대해지는 지식괴물이란 리바이어던을 낳을 것이다. 학문 간 균형과 교육의 상호작용을 전제하지 않는 전공선택제는 학과의 긍정적인 장점도 살리지 못하고, 선택받지 못한 학생들의 소외감과 전공 역량의 부실함만 낳지 않을까? 국문학과는 없어져도 국문학 전공은 남을 수 있다는 것은 궤변에 불과하다. 융합의 참된 가치는 융합 대상이 각기 든든할 때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융·복합형 인재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기초 학문 위에서 길러질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애플사의 창업주 스티브 잡스는 리드대학 철학과를 중퇴했고, 경영혁신의 대가 피터 드러커도 학부 전공이 법학이다. 멀티미디어 개념의 창시자인 MIT 미디어랩의 니컬러스 네그로폰테도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한국이 낳은 천재 첼리스트 장한나는 대학원을 철학과로 지원했다.

융·복합형 인재를 길러내려면 학점으로 줄 세워 취업 잘되는 학과나 전공에 정원을 몰아주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주어진 다양한 전공 안에서 창의적인 사유와 통합적인 지식 습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금 모교에서 추진하려는 구조조정안은 융합형 인재를 길러내기는커녕 대학을 단순 취업의 전쟁터로, 학생들을 학점의 노예로 만들 위험이 농후하다. 다양한 지식과 학문 간의 상호 이해와 통섭적 상상력이 융합형 인재를 길러낼 수 있고, 그 출발은 탄탄한 기초학문의 구축에 있다.

중앙대 문예창작과 학생들이 지난 해 학교 측이 전임교원을 충원하지 않아 수업권을 침해받고 있다면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모교의 이번 선진화 계획이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 안이 어쩌면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중앙대학교의 정체성을 뿌리째 흔들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2018년에 100주년을 맞는 중앙대학교는 그 어떤 분야보다도 인문과 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국문학, 영문학, 일문학, 심리학, 민속학, 문헌정보학 분야는 탁월한 교수진과 동문 후학을 길러내면서 국내 인문학 분야에 오랫동안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1972년 서라벌예술대학교를 합병한 이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은 연극학과, 영화학과, 문예창작과 등에서 배출된 동문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한국 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대학 본부는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인문대가 취업이 안 되고, 가장 경쟁력 높은 예술대는 경쟁 대학보다 지나치게 비대하다는 이유로 구조조정의 칼을 들이대려고 한다. 중앙대학교에서 인문·예술을 빼고 과연 학교의 역사와 정체성을 논할 수 있을까?

이번 선진화 계획은 대학 정원을 수년 내에 대폭 줄여야 하는 구조조정안과 맞물려 있다. 중앙대학교가 교육부로부터 교육개혁 분야의 우수 대학으로 선정되려면 모르긴 몰라도 수백명의 입학 정원을 줄여야 한다. 본부는 아마도 학과제 폐지안을 입학 정원을 줄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안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도 취업 안 되는 인문·예술계 학과가 정원 축소의 목표물이 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학평가, 취업률에 전적으로 맞추어진 학과제 폐지안이 융합인재 양성의 가장 기본적인 두 축인 ‘지성의 인문학’과 ‘감성의 예술학’의 토대를 뒤흔든다면, 대학은 결국 기업인의 전당, 장사꾼의 요새가 될 것이다. 그것도 인문과 예술을 생명으로 살아온 중앙대학교에서 앞장서서 인문과 예술을 죽이는 대학기업화 전쟁의 전위에 선다면, 학교는 정당성도 명분도 정체성도 모두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제 동문 지식인들과 연예인들이 나서야 할 때이다.


이동연 |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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