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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주거정책에는 기본적으로 주거를 삶의 문제로 바라보는 철학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임대료는 평균 소득자가 부담할 수 있도록 유지되어야 한다. 임대료 인상률 상한제는 바로 이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임대인과 임차인 간 공정한 균형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미래를 위해 돈을 투자하는 임대인은 계속 돈을 벌 것이다. 그러나 임대주택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집이다. 임대주택을 이용한 이윤의 극대화가 집에 대한 투자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2015년 독일 법무부 장관의 연설은 주거정책의 철학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보여준다.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나 이웃의 일본은 임대차 안정화(Lease Stabilization)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기본 내용은 임대인이 정당한 이유 없이 임대차의 갱신(재계약)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하여 장기 임대차를 통해 주거의 안정을 꾀하는 것이다. 단기 임대차에 의존하는 한국에서는 사실상 밀려나가는 비자발적인 이주와 이에 따른 아이들의 학교 통학, 긴 통근시간과 교통 문제, 빈발하는 전·월세 인상 문제 등이 발생한다. 주거비 부담을 나타내는 지수가 RIR(월소득 대비 임대료 비율)인데, 2016년 저소득층의 RIR은 23.1%로 매월 수입 중 4분의 1가량을 주택 임대료로 지출하고 있다. 서울은 임차가구의 47.8%가 소득의 4분의 1 이상을 주거비로 사용하고 있고, 저소득층은 더 심각하여 소득 1∼4분위 가구는 소득의 31%를 주거비로 사용하고 있다. 서유럽 국가에서는 소득의 20% 이상을 주거비로 사용하는 가구를 주거지원 대상으로 보는데, 서유럽의 시각에서 보면 서울의 임차가구 절반 정도가 국가의 지원이 필요한 계층인 셈이다.

보수적인 경제학자들은 임대차 안정화 제도를 임대료 통제 제도와 같이 임대료를 국가가 직접 통제하는 것처럼 비판한다. 하지만 임대차 안정화 정책의 핵심 기제는 임차인이 임대인과 대등한 협상을 통해 임대차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다. 계약 갱신의 보장으로 임차인이 정당한 이유 없이 쫓겨날 염려는 없으니, 한국에서처럼 나갈 것이냐, 인상된 임대료를 수용할 것이냐를 강요당하지 않는다. 보수 경제학자들이 경제모델로 삼고 있는 미국에서조차 LA, 뉴욕, 보스턴, 볼티모어 등 대도시가 있는 주에서는 임대차 안정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전·월세 인상률 상한제에만 주목하여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 임대료를 정하는 과도한 통제정책이라는 이념논쟁에 치우쳐 논의되는 바람에, 임대차 안정화 정책의 기본인 계약 갱신 제도나 정보의 비대칭을 해소하기 위한 임대차 정보 제공 제도, 분쟁조정 제도 등에 대해서는 제대로 논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임대차 안정화 제도는 ‘계약 갱신청구 제도→적정임대료 정보 제공→임대료 협상과 분쟁 조정→인상률 상한제’ 등의 유기적 연관체계로 운영되는 것이다. 인상률 상한제는 임대료가 급등할 때에 대비하는 안전장치로 보충적 기능(독일의 경우 3년 동안 20%)을 하는 제도일 뿐이다.

임대차 시장은 실수요로만 이루어진 시장이어서 대도시 임대차 시장은 조금의 수급불균형에도 임대료 폭등이 발생할 수 있는 불안정한 시장이다. 헌법 제119조 제2항은 불안정한 시장에 대해서는 국가가 개입하여 합리적인 규제와 조정을 통해 경제주체(임대인과 임차인) 간의 조화와 안정을 꾀하도록 하고 있다. 임차인의 상당수는 사회초년생이거나 저소득층인데, 인간다운 삶의 필수요소인 주거에 관한 부담과 불안정의 증가는 이러한 취약계층의 헌법상 인간다운 생활을 할 기본권을 침해한다. 그래서 어느 나라나 보편적으로 대도시 임대차 시장에 대해서만큼은 자유방임이 아니라 국가가 개입하여 임대차 안정화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11월 초 정부의 주거복지 로드맵이 발표된다. 그런데 계약갱신 제도 등 임대차 안정화 정책은 또다시 장기과제로 미루고 임대사업자 등록제의 시행에 중심을 둘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임대사업자 등록을 하고 5~10년의 장기 임대차와 갱신 시 임대료 인상률 적용 등 공적 규제를 받는 임대인에게는 임대소득세, 사회보험료 감면의 혜택을 주고, 반면에 등록을 거부하는 임대인에게는 임대소득세, 보유세, 사회보험료 등을 철저히 징수하여 임대사업자 등록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부동산세제에서 조세정의를 실현하고 계약갱신 제도, 임대료 인상률 등의 임대차 안정화 정책을 등록된 임대차에서나마 시행하는 것은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 하지만 몇 만 가구 이상의 임대사업자 등록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등록된 임대차에 대해서만 임대차 안정화 정책을 시행한다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다. 임대차 관계는 지역마다 편차가 큰 만큼 전국적으로 동일한 정책을 시행할 필요는 없겠지만, 임대차 관계가 불안정한 대도시 지역이나 수도권에서는 서유럽이나 미국의 대도시 지역에서 보편화되어 있는 임대차 안정화 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임대차 안정화 정책의 기본이 되는 계약갱신 제도만이라도 도입해야 한다. 한국의 국토교통부(또는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주거를 수익을 내는 상품으로서만이 아니라 거주자의 삶의 문제로 바라보는 주거정책의 철학을 들을 수 있길 기대한다.

<김남근 |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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