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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흔두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꼭 할 말이 있다는 듯 허공에 가쁜 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의 말을 알아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의 유일한 화자이자 청자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 눈감기 전, 그는 자기 말을 알아듣는 누군가가 한 명쯤 곁에 있길 바랐다. (…) 수백만년 이상 엄숙하고 엄연하게 존재하다 한순간에 우르르 무너지는 얼음의 표정과 흡사했다.” (김애란 단편 ‘침묵의 미래’ 중)
이 소설은 세계에서 각기 다른 모국어를 마지막으로 구사할 수 있는 ‘마지막 화자’들에 관한 얘기다. 이들은 ‘중앙’에 의해 만들어진 소수언어박물관이라는 곳에 수집돼 살아간다. 사라져가는 언어를 보존하고 연구한다는 취지이지만 전시물로 전락한 사람(언어)들은 소멸하거나 소멸을 기다릴 뿐이다. 천여명의 마지막 화자가 죽으면 천여개의 언어가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절망스러운 것은 언어가 사라지면 천여개의 작은 세계, 고유 문화, 그 생명력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작가가 상징한 것이 언어만은 아닐 테지만 현실도 소설 속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전 세계 언어는 7000여개로 추산된다. 언어학자들은 이들 중 절반 가까이가 향후 100년 안에 사라질 것으로 본다. 힘과 권력, 자본싸움에서 밀려난 언어들은 사라져왔고 앞으로도 그럴 공산이 크다.
서울 태생인 나는 항상 서울 태생이라는 사실이 불만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나고 자랐다면 분명 다른 지역 언어를 한 가지쯤 체득했고 또 하나의 세계를 더불어 갖고 있을 것이란 아쉬움 때문이다. 어렸을 때 첫 사투리의 기억은 대구 출신 엄마의 심부름 말이었다. “정지(부엌) 가서 띠비(뚜껑)랑 가시기(가위) 가져온나….” 암호 같은 말을 해독하기 위해 어린 감각을 일깨워 몰두했던 기억이 난다.
반면 1980년대 후반 잔뜩 호기심을 갖고 처음 제주에 갔던 때, 버스에서 들려온 현지 청년들의 표준말에 실망한 기억이 있다. 신문기사는 물론 표준어를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때에 따라 사투리 특유의 말맛과 정서가 필요할 때가 있다. 구수하고 징글징글 맞고, 때론 절절한 심정을 담아내야 할 때 표준어로는 한참 모자란 감이 있다. 단지 글자, 말의 문제만은 아니다. 언어는 고유의 매개이면서 정신(생각) 그 자체이다.
‘침묵의 미래’를 떠올린 것은 얼마 전 <남한산성>을 보고 회사 동료들과 얘기하며 만주어가 화제가 된 때문이다. 청의 대군을 이끌고 온 칸(청나라 황제)의 낯선 발음과 특유의 억양. 만주어는 매력적이었다. 풍전등화에 놓인 조선 운명과 대비된 때문인지 힘 있고 카리스마 있게 느껴졌다. 그러나 실제로 만주어 역시 멸하고 있는 언어다. 청나라 황실의 언어로 글자는 남아 있으되 말로써 쓰임은 사라진 지 오래다. 알타이어 언어학자나, 소수의 역사학자가 학문 연구를 위해 알고 있을 뿐이다. 국내에서도 고작 20명 안팎이 문자로 인식하고 있고 말로써 구사하는 이는 극소수다. <남한산성> 배우들은 만주어 대사를 한글 발음으로 옮겨놓고, 몽골 출신의 외국어 강사가 발음해 녹음한 것을 수백번씩 따라 하며 익혔다고 한다. 그 덕분에 영화는 더 풍성할 수 있었다.
우리 시대 멸하고 있는 것이 어디 소수 언어뿐이겠는가. 소수이거나 때로는 힘없는 다수, 표준·중앙으로 불리는 것과 다른 것들…. 설령 물리적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유령처럼 존재하거나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주민,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들은 때론 다른 언어로 취급된다. 이들은 끊임없이 다양한 방식의 폭력에 노출되고 대상이 되곤 한다.
다양성에 대한 소리가 높지만 현실에선 다르다. 힘의 논리가 앞서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갈등의 근저에는 고유의 특성과 존재방식, 다른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 폭력이 작동한다. 앞선 정권들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핵심도 다른 소리를 차단하겠다는 거였다.
갈수록 이성적 판단과 영감을 얻기 어려운 시대, 나와 다른 존재가 주는 에너지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사고력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건강을 지키는 비결 중 하나가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와 악기 연주를 익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모두 소리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른 소리는 생경함으로 자세를 낮춰 집중하게 만들고 귀 기울이고 머리와 가슴을 열게 한다. 하물며 한 인간의 영혼을 예리하고 맑게 만드는 이 비결이 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클까.
우리 사회의 전두엽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소수, 다른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이고 존중해야 한다.
<김희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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