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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인 정보의 불확실성과 불신이 시민들의 불안에 걷잡을 수 없는 기름을 붓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당국이 내놓은 정보를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신뢰는 주어진 정보와 눈앞에서 펼쳐지는 상황이 맞지 않을 때 결정적으로 흔들린다. 이럴 때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은 정보와 상황 사이의 불일치를 진정시킬 수 있는 합리적 설명을 내놓는 것이다. 그 설명이 납득 가능할 때 사람들은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안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방역당국은 정보와 상황 사이의 불일치를 메우려고 하기는커녕 그저 믿으라고만 윽박질렀다. 이 불일치를 메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꼼꼼한 역학조사였다. 꼼꼼한 역학조사를 통해 비말감염임에도 이렇게 급속도로 확산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신속하게 제공했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은 이 정보를 믿게 된다. 그런데 이 정부는 역학조사를 제대로 하지도 않았고 은폐하려는 듯한 모습마저 보였다. 공적인 정보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때 시민 간의 신뢰도 무너진다. 인류학자 고프먼의 말을 살짝 비틀면 우리는 자신이 속한 친밀성의 공동체 너머 사회 구성원들과 ‘무심한 신뢰관계’에 있다. 별다른 일을 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나를 해하지 않고 내가 그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고 믿을 때 우리는 친밀성 너머의 사람들에 대하여 무심할 수 있다.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별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반면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내가 곳곳에서 마주치는 사람이다. 우리는 믿을 만한 정보를 찾아 인터넷을 뒤지지만 신뢰는 방문 앞에서 멈춘다. 방문을 나서는 순간 접촉 자체가 위험이 된다. 믿을 만한 것은 멀리 있는 시민이고 가까이 있는 시민은 위해 요소가 된다. 더 이상 무심할 수도 없고 신뢰할 수 없다. 사람들은 신경질적으로 날카로워지고 공격적이 된다. 사회 구성원 간의 ‘무심한 신뢰’는 ‘날 선 불신’으로 대체된다. 사회가 박살나는 것이다.

잔인한 순간은 이다음에 온다. 국가권력이 이 문제에 대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불신을 만회하기 위해 위험을 일선과 아래로 전가해버린다. ‘격리’는 감염의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격리는 비감염인을 감염의 위험에 노출된 사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지만 동시에 그들을 ‘날 선’ 비감염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여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감염의 위험에 노출된 사람은 ‘날것의 폭력’을 맞이하게 된다. 지금 감염인뿐만 아니라 의료인과 의료 노동자들은 메르스와 싸우는 일선에서 감염에 노출되고 지역사회에서 고립되는 위험에 처해 있다.

위험을 아래로 전가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새로운 희생양을 만드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입원한 환자들에 대한 아무런 조치 없이 국립중앙의료원을 메르스 전담병원으로 지정한 것이다. 한겨레신문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국립의료원에 입원해 있던 저소득층 환자 100여명은 졸지에 다른 병원으로 옮겨가야 할 처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메르스 공포가 확산될 대로 확산된 상태에서 이들을 받아주겠다고 선뜻 나설 병원은 없다. 이 환자들은 갈 곳이 없어져버렸다. 가장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위험을 전가해버린 것이다.

전국 최대 규모의 민속 5일장인 경기 성남시 모란시장이 9일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확산을 막기 위해 임시 휴장하면서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출처 : 경향DB)


메르스 사태는 성찰하지 못하는 통제기구야말로 얼마나 위험한지를 교과서처럼 보여주고 있다. 신뢰를 잃은 이들이 불신과 불안을 잠재우는 유일한 방식은 일선과 아래를 새로운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이다. 당장의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이들의 조치에 박수를 보내게 함으로써 우리를 ‘동료’ 시민을 팔아 자신의 안전을 구하는 공모자, 악마로 만들고 있다. 내가 일선과 아래를 위태롭게 하는 위험이 되는 것이다. 이 사슬을 끊어야 한다. 무심한 신뢰를 지키기 위해 어느 때보다 일선과 아래에 관심을 갖는 시민적 연대가 필요하다.


엄기호 | 문화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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