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첫번째 메르스 확진 환자가 발생했던 지난 5월20일 질병관리본부 직원들은 충북 충주시에 소재한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 자활연수원에서 1박2일간의 잔치를 시작했다. 검역소 발전 방안에 관한 워크숍과 족구 경기, 우수 검역관에 대한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 등으로 진행된 이 ‘잔치’가 공교롭게 이 날짜에 열린 것은 5월20일이 제3회 ‘검역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1886년 5월20일, 조선 정부는 불허온역진항장정(不許瘟疫進港章程)을 제정, 공포했다. 장정이란 지금의 법률에 해당하며, 온역은 고열을 동반하는 모든 급성 전염병을 말한다. 현대 용어로 풀어 쓰면 ‘급성 전염병을 옮길 우려가 있는 선박의 내국 항구 진입을 불허하는 법률’ 정도가 된다. 2013년에 정부는 이 장정 제정을 기념해 5월20일을 검역의 날로 정했다.

이 무렵 조선 사람들은 역병의 발생 원인과 예방법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역병을 원통하게 죽은 귀신들이 퍼뜨리는 병이거나 하늘이 군주의 실정(失政)에 경고하는 신호로 해석했다. 치료법이라야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정도였고, 예방법은 환자와 접촉을 피하는 ‘경험방’뿐이었다. 증상이 나타나지 않은 감염자를 확인할 수 있는 진단법은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조선 정부가 국제 기준에 따른 방역 법률을 제정한 것은, 이것이 근대 문명국가의 표지였기 때문이다.

인간 생명의 ‘3대 주적’은 전쟁, 기근, 역병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역병의 살상력이 가장 컸다. 역병은 인간의 대규모 이동 이후에 치성(熾盛)했다. 인간은 언제나 세균, 바이러스 등과 함께 이동했으며, 처음 밟은 땅에 그들을 퍼뜨렸다. 몽골군과 접촉한 이후 반복적으로 페스트의 참화를 겪었던 유럽인들은 역병이 어떤 재앙보다도 무섭다는 사실을 절감했고, 그 확산을 막기 위한 집단적 대응책을 세워갔다. 유럽인들은 16세기 이후 지구 전체로 활동 반경을 넓힐 때도, 자기들이 점령한 땅의 원주민보다 질병에 더 촉각을 곤두세웠다.

숱한 시행착오와 희생 끝에 그들은 개인, 가족, 마을 단위에서 역병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국가 단위에서라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세균에 관한 과학적 지식이 생기기 훨씬 전에, 국가 단위의 방역 체계가 만들어졌다. 국가는 죄 없는 사람을 심문하고 검사하며 감금할 권리를 확보하는 대신, 역병의 확산을 막을 책임을 전담했다. ‘천부인권’을 신봉하는 사람들도 역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국가에 기꺼이 자기 권리를 양도했다.

1886년 온역장정 이후 이 땅에서 방역을 명분 삼아 자행되었던 국가권력의 인권 유린은 일일이 매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한국은 위생국가로 발전하는 데 성공했다. 2003년 전 세계적으로 사스가 창궐했을 때에는 사스 예방 모범국으로 국제적 칭송을 받기까지 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 6월 4일 (출처 : 경향DB)


그런데 2015년 6월, 메르스 방역 실패로 한국은 현대 문명국으로서의 자격을 의심받기에 이르렀다. 이 질병의 원산지인 중동 국가들 중에서도 우리나라보다 많은 환자가 나온 곳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뿐이다. 중동 국가를 제외하면 압도적인 세계 1위다. 현대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권리를 갖는 것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선을 다해 지켜줄 의무를 전담하기 때문이다. 김선일 피랍사건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말한 대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 주는 것은 국가의 기본 의무”다. 현재의 어처구니없는 메르스 확산은 국가가 기본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겼다. 국가의 기본이 무너진 것이다. 게다가 이 붕괴는 현 정부가 늘 모든 문제적 현상의 원인으로 지목해 왔던 ‘과거로부터 이어온 적폐’와는 전혀 무관하다. 과거 12년 전에 이 나라는 방역 모범국이었다. 그랬던 나라가 12년 만에 최악의 방역 후진국이 된 것이다. 나라의 기본을 이렇게 망가뜨렸으면, 국정 총책임자가 책임을 통감해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질책할 뿐 국가의 기본이 무너진 게 자기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명박 정부는 ‘국격’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가며 ‘국가의 품격’을 높였다고 자화자찬했지만, 지금은 냉정하게 ‘국가의 자격’에 대해 의문을 던질 때다. 국가의 기본이 왜 이렇게 무너졌는지, 국가 운영을 책임진 사람들 스스로 통렬히 반성하지 않으면, 국민은 ‘나라 잃은 백성’과 다를 바 없는 불쌍한 처지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일반 칼럼 > 세상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리병원의 ‘사회적 비용’  (0) 2015.06.12
시민을 ‘악마’로 만드는 국가  (0) 2015.06.08
‘김상곤호’가 성공하려면  (0) 2015.06.02
‘다윗’들의 인간선언  (0) 2015.06.01
금강산 가는 길  (0) 2015.05.29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