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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농협이 합병되었다. 부실 채권으로 못 받게 된 빚이 150억원. 이걸 감사한 농협중앙회는 이대로는 어렵다면서, 대책이라고 내어 놓은 것이 합병을 하라는 것이었다. 농협 직원이 잘못을 저질러서 재정에 문제가 생겼으니, 합병을 해라? 합병을 하면, 지역농협에 무이자로 지원금을 준다고 한다. 그걸로 당장 불거진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 우리 지역 농협은 이번 금융 범죄 사건만 아니라면, 면 단위 작은 농협이었지만, 자기 살림에 큰 문제가 없는 농협이었다. 그런데도 해결책은 합병뿐. 농협중앙회는 지역 농협이 합병을 하기만 하면, 지원금을 준다. 무조건이나 다름없다.

농협 직원들은 합병 찬반을 묻는 투표를 앞두고, 마을마다 돌면서 설명회를 했다. 합병을 하면, 지원금으로 280억원을 받아 정상화를 시키겠다. 앞으로는 금융 사고가 나지 않도록 더 조심하겠다. 이런 얘기들이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합병이 성사가 안 되면, 출자금 20%가 날아갑니다. 자칫하면 반 동가리 날 수도 있어요.” 누군가 저지른 금융 범죄의 대가는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출자금 감액이었다. 금융 범죄와 합병과 출자금 감액의 인과관계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결론은 분명했다. 합병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으면 몇백, 몇천만 원씩 들어 있는 조합 출자금이 뭉텅이로 사라진다는 것. 설명회 자리에서 이번 일이 조합원 전체한테 책임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자, 할머니 한 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옛날에 잠도 안 자고, ‘쌔가 빠지게’ 일해 가지고, 그런 거를 (농협 만든다고 해서) 출자금 떼고 그래가 만든 기라. 시집 와 가, 스물 몇 살에 일할 때, 집집이 없는 돈 모다 가지고 그랬다고. (누에)고치 키워 팔고, 매상(쌀 수매) 하믄 거기서 미리 떼고. 그래가 만든 기라. 그래, 이때까지, 농협이 언제 농민 편들었는데? 그래 놓고, 지들이 돈 해 처먹고는, 우리 책임이라고? 농협 만들 때부터 지금까지, 즈그들끼리 돌라 묵고, 갈라 묵고, 빼 묵고. 그리 처묵은 게, 다 어디서 난 기고?”

투표는 순조로웠다. 찬성표가 80%쯤 나왔다. 며칠 후 마을 이장님이 서명지를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녔다. 이장단이 임시회의를 하고, 돌리는 서명부였다. 금융 범죄를 저지른 농협 직원들을 엄벌에 처해 달라. 아니지, 엄벌 아니다. 잘못한 만큼, 딱 그만큼만 처벌해 달라. 청와대에, 검찰에, 법원에 내겠다고, 탄원서를 썼다. 이 시골에서 오죽했으면, 이장단이 나서서 서명부를 돌렸을까. 다 아는 사이에! 한 사람 한 사람 마을사람들 이름이 빼곡하다. 덕석말이라도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름 석 자 써 넣는 것이.

농협은 농민들의 출자금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랬다가 농업은행을 시작으로, 여러 조직을 합쳐서, 단일 협동조합으로는 전 세계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큰 협동조합이 되었다. 그래서 지역농협의 문제를 합병으로만 풀려는 걸까. 규모가 커진 만큼 농협은 농민한테서 멀리 있다. 여든 가까이 된 할머니, 매상한 돈을 떼서 시작한 농협은, 농민들 출자금을 쥐고, 시골의 경제활동 전체를 쥐락펴락하면서, 늘 농민한테 욕을 먹는 조직이 되어 있다. 아마 욕을 많이 먹는 협동조합으로도 전 세계 순위권에 들 것이다.

농업회의소라는 것이 있다. 꽤 오래전부터 시범 실시하던 것이었고, 문재인 정부의 공약으로도 되어 있다. 농협이 아닌 다른 길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깊게 고민하고, 정부와 이야기를 해야 하는 일이다. 농협이 해 오던 일과 더불어, 농민이 농민단체한테 맡겨 두었던 일도 제대로 되게끔 하려는 뜻도 있다. 이것을 몇 년 동안 시범실시한 지역의 사례도 속속 나오고 있다. 하지만 국회의 입법 절차를 거쳐야 하는 다른 공약들과 마찬가지로, 잘되지 않고 있다. 농협 개혁의 첫걸음이랄 수 있는, 농협조합장 동시선거의 정상화를 도모하는 법안도 국회에 발목을 잡혀 빠져나오지를 못하고 있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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