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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 아현지사 통신구에 화재가 발생한 날. 우리는 크고 작은 ‘단절’을 경험했다. 전날까지도 메신저를 주고받던 지인과 온종일 연락이 닿지 않은 것은 기본이고, 불이 난 지역 인근 가게들에서는 카드결제가 불가능해 그날 영업을 종료한 곳이 속출했다. 그 다음주 초반까지 ‘업무정지’ 상태가 된 사업장도 많았다. 화재가 발생한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울 마포구 용강동에서는 70대 노인이 심장에 통증을 느껴 쓰러졌으나 전화를 걸 수 없어 결국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누군가는 이 사태를 두고 ‘초연결사회’를 실감했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초단절’의 위험성도 절감한 며칠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어딘가에 연결될 수 있는 사회이고, 오랫동안 단절된 남과 북이 비로소 연결된 뜻깊은 해로 기억하기도 벅차건만 2018년을 보내는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슬픈 단절을 경험하고 있다. 12월11일. 24살 청년이 화력발전소 컨베이어벨트에 끼여서 사망했다. 그는 24시간 멈추지 않는 기계에 끼여 단절된 상태로 세상과 이별했다. 그 화력발전소에서는 2010년부터 12명의 하청업체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렇게 허망하게 동료를 보내며 노동자들은 수차례 근무환경 개선을 요구했지만, 위험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결과 귀한 생명이 ‘또’ 사라진 것이다. 그가 일하던 9번 컨베이어벨트는 멈췄으나 1~8번은 지금도 안전장치 하나 없이 사람을 기계처럼 돌리고 있다고 한다.
김용균씨가 사망한 일주일 후. 대학 입시를 마친 어느 고등학교 남학생 10명이 여행을 갔다가 강릉의 한 펜션에서 3명은 숨진 상태로, 7명은 의식불명인 상태로 발견되었다. 위험을 감지하여 생명을 연결할 경보장치만 제대로 설치했다면 막을 수도 있었던 인재(人災)였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그들은 ‘스무 살의 봄’을 보지 못하고 세상과 영원히 단절되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위험하다는 걸 죽음으로 증명할 뿐 아니라, 살아남은 이들이 용기 내어 신호를 보내는데도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올 한 해 사회를 흔든 미투(MeToo) 운동은 가해자들의 ‘무죄’로 귀결되고 있다. 여성 부하 직원을 수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도 무죄, 해군 여성 대위가 성소수자인 것을 악용, 성폭행하여 임신과 낙태라는 끔찍한 일을 겪게 한 두 명의 해군 간부도 무죄, 단원을 성폭행한 혐의로 6년형을 선고받은 연극연출가 이윤택씨도 추가로 기소된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런 변태적 관행을 끊어내기 위해 여성들이 자신의 인생을 걸고 쏟아낸 증언들과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로의 이행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에 입법부와 사법부는 눈을 감고 귀를 닫아버렸다. 그렇게 상식과 정의와의 단절을 택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고, 제 식구를 감싸는 일에는 징글징글하게 연결되어 있다. 컨베이어벨트에서 꺼내줄 동료와의 단절이나 강릉 펜션의 어긋난 연통과 애초에 설치되지 않았던 가스경보기처럼 연결해야 할 것과 단절해야 할 것을 정반대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75m 굴뚝 위와 차가운 거리에서 함께 살자고 외쳐도, 안전한 사회를 위해 낡은 시스템을 점검하고 바꾸자고 요구해도, ‘(성)폭력의 시대’를 끝내자며 거리로 쏟아져 나와도 도무지 변하지 않는다면 ‘단절사회’라는 말 외에 무엇으로 지금 내가 살아가는 곳을 설명할 수 있을까.
단절사회의 가장 큰 징후이자 위기는 ‘감각 없음’일 것이다. 단절되었기에 감각이 없고, 감각이 없기에 단절될 수밖에 없는 고통의 악순환. 이 악순환 속에서 소중한 생명이 사라지고, 누군가의 삶은 망가진다. 우리는 어떻게 사회적 고통을 ‘감각’하고,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서로에게 연결될 수 있을까. 이 어려운 질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으로 2019년을 시작하고 싶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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