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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엄마를 따라온 한국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 친구와 학교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출입국사무소를 다녀오던 길이었습니다. 꽉 막힌 거리에 가야 할 거리는 아직 많이 남았지만 서로 주고받을 이야깃거리가 금세 바닥을 들어내고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만 흐르고 있었습니다. 사실 학교생활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지만, 뭔가 괜한 상처가 될까 싶어 입안에만 말이 맴 돌았습니다. 침묵을 견디다 못해 튀어나온 이야기라고는 20년도 지난 옛날 중학생들의 일상이었고, 저 아재의 추억담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한 녀석은 손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눈은 창밖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노래가 한 곡 흘러나왔습니다. 요즘 노래가 아닌 오래된 노래인데 최근에 케이블방송 음악 프로그램에서 다시 불리는 모양입니다. 지루했던지 녀석도 조금씩 노래를 따라 불렀고,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놓지 않기로 유명한 저도 나름 화음을 보태 흥얼거렸습니다. 조그마한 차 안에서 옛날 노래 한 곡을 함께 흥얼거리면서, 녀석과 처음으로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눈이 마주칠 때는 서로 피식 웃기도 했습니다. 음악이 가진 오묘한 힘을 새삼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두어 달에 한 번씩 인권지킴이라는 이름으로 찾아가는 노숙인 사회복지시설 영등포 보현의집에는 윈드 오케스트라가 있습니다. 처음  방문할 때만 하더라도, 노숙인 자활시설에서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는 것이 좀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여러 번 오가며 서로 얼굴을 익힌 다음에 오케스트라에서 트럼펫을 부는 아저씨에게 물었습니다. 오케스트라를 하면 뭐가 가장 좋으냐고. 평소에도 앞니가 빠진 것 때문에 웃을 때 입을 가리며 웃던 아저씨는 수줍어하는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내 소리 내기에 바빴는데 언젠가부터 다른 사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어요. 서로 한 호흡을 맞춰갈 때마다 여기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지만 뭔가 가까워지는 것 같아 좋아요.” 다른 사람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것, 그리고 그 호흡에 내 소리를 맞춰간다는 것, 굳이 평화·인권·공존이라는 어려운 말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음악을 통해 주고받고 있는 삶의 경험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하모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모양도 소리도 서로 다른 악기들이 만나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피부색과 언어와 삶의 배경이 다른 우리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서로 만나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내는 경험을 직접 나눠주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경험을 나눠주고 싶었습니다. 친구들이 자라는 미래에는 서로의 다름이 공동체의 위협이 아닌 풍요로움이 되고, 그 풍요로움이 다시 새로운 가능성이 되는 공존의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다문화 청소년 윈드오케스트라 ‘미라클 윈드오케스트라’ 프로젝트는 그런 마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대림동 주택가 낡은 연습실을 밝고 예쁘게 꾸몄습니다. 올해 초 영등포구 협치 사업으로 선정되어 구청을 중심으로 음악 지도의 전문성을 가진 악기 선생님들과 이주민 지원활동을 꾸준히 해온 ‘이주민센터 친구’등 지역의 시민단체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 참여하고 있습니다. 기말고사가 끝날 즈음이면 아이들이 관악기 소리를 들어보고, 직접 불어보는 ‘찾아가는 악기설명회’도 예정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중국에서 온 손자를 데리고 할머니가 연습실에 찾아오셨습니다. 한국말이 서툴렀지만 중국에서 온 이주 여성 자원활동가의 통역으로 음악선생님과 악기 면접을 마쳤습니다. 지역 시민단체 활동가가 기부해준 오래된 클라리넷을 불어보며 활짝 웃는 꼬마의 모습을 보며 작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미라클 윈드오케스트’가 만드는 기적의 하모니를 위해 따뜻한 격려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조영관 |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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