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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 작가가 말하는 미래 인재가 되는 법.’ 중·고등학교에 강연을 가면 가끔 민망한 현수막을 본다. 승자독식의 경쟁사회를 비판해 달라고 초대받았으니 황당하다. 이유인즉, 섭외 교사가 ‘진로특강’ 명목으로 윗선에게 결재를 받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강사 초청이 물 흐르듯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맥락을 모르는 교장, 교감은 여기가 지역 명문이다, 작년 입시결과가 어떠하다는 등 학력주의가 가득한 인사말을 멈추지 않는다. 때로는 학부모도 함께하는데, 내 이야기가 자녀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속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미래를 편협하게 제시한다. 일부 성공 사례를 포장하여 불평등을 은폐하는 강사들이 여전히 인기다. 4차 산업혁명, 블루오션, 변화, 혁신 등의 단어들이 남발되고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어내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위험한 결론이 부유한다. 공부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특출한 재능에 집중하면 불가능은 없다는 고전적인 위로도 한결같다. 무엇도 특별하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세상을 만들자는 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 최적화된 학교에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다르지 않은 교육자를 만날 때면 슬프다. 교사 연수에서 내가 “배달노동자가 죽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 새로운 플랫폼입니까?”라는 물음을 던지면 어리둥절한 낯빛을 감추지 못한다. 1등을 지나치게 미화하지 말고 계층 차별의 근간이 되는 학력주의를 의심하기 위해 공정한 경쟁이라는 신화를 깨자고 하면 발끈한다. 대학 이름이 성실함의 결과가 아니면 무엇이냐고 혀를 차고, 자신이 공정하지 않게 교사가 된 것이냐며 노력을 폄하하는 게 평등주의냐고 따진다.

여러 원인들이 있을 게다. 일단 교육학의 전제가 ‘인간의 자기 성장’이고 무엇보다 교사 스스로가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 바늘구멍을 통과했으니 이 가치를 더 확신한다. 학부모들 입장에서는 사회의 변화를 기대하며 자녀를 내버려두기에는 좌불안석이니 개인을 이롭게 하는 즉각적이고도 선명한 해결책을 학교에 재촉한다. 그래서 오직 성장의 관점에서만 인간이 다루어지고 성공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증명으로만 획일적으로 사용된다. 이를 꾸짖는 여론은 없다. 언론은 입시결과에 호들갑이고 명문대로 진학한 선배들만이 모교를 방문하여 후배들에게 죽도록 공부했다는 무용담을 들려주기 바쁘다. 학력주의가 정당화되고 능력주의가 신성하게 포장되면 학생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실패하는 것 아니냐는 아찔한 철학을 내면화한다. 평범한 다수가 살아가는 세상에, 다수가 관심을 가지지 않은 역설은 완성될 수밖에 없다.

불평등을 ‘줄이는’ 안목을 키워주는 교육을 고민하지 않고 불평등에서 ‘벗어나는’ 묘수만을 나열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파할 사람은 다름 아닌 교사다. 양극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서 순응하고 구체적인 절망을 파괴하는 것을 체념한 학생들은 어설픈 희망의 빛에 매료되어 대학 서열화를 신봉하고, 가족 모두의 힘을 빌려 피 말리는 입시경쟁에 매진할 것이다. 족집게 강사가 교사보다 존경받을 수밖에 없다.

새로운 플랫폼이 마냥 긍정적으로 포장될수록 일자리를 잃는 사람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 돼버린다. 혁신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한쪽에서는 허술해진 안전장치 위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노동자가 무수하다. 효율성이라면서 등장한 괴상한 상벌점제는, 해고가 두려워 안전수칙을 지키지 못해 사고를 당하는 개인을 늘린다. 5월28일은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던 청년노동자가 목숨을 잃은 지 3년째 되는 날이다. 지난 9년간 과로사로 사망한 집배원이 82명이다. 이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학생들은 자신은 예외가 될 방법만을 듣는다. 학생은 물론이고 교사의 미래도 끔찍할 것이다.

<오찬호 |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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