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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희미한 이름으로 전화가 왔다. 15년간 휴대폰에 저장만 돼 있었지 안부도 몰랐던 그는 내가 고시원에 살 때 옆방 사람이었다. 창문이 있을 리 없는 지하, 방 가운데서 양팔을 벌리면 손끝에 벽이 닿는 공간을 마주하며 살던 우리는 내가 바퀴벌레 살충제를 빌려주면서 잠시나마 친밀했었다. 그는 영화 <기생충>을 보고 옛날 생각에 사무쳤단다. 우리는 장마철에 하수구가 역류하면 지하로 똥물이 뚝뚝 떨어졌을 때의 참담함과 그걸 욕하면서 아껴뒀던 컵라면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던 애처로움을 떠올리며 근황을 주고받았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그 시절의 나는 바닥에서 버티기 위해 바닥 이야기를 자주 했다. 사람이 자신의 고충을 외부에 알리는 건 사회가 좋아지기 위해 당연한 것이지만, 나는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무리들 앞에서만 한숨의 강도를 높였다. 누가 하숙집 월세 내기가 버겁다고 하면, 혹은 누가 춥고 더운 옥탑방의 고충을 꺼내면 나는 이렇게 말했다. “끝판왕은 창문 없는 지하 고시원 방 아니겠어?” 특히 그 작은 방에 얼마나 많은 짐이 수납될 수 있는지를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설명할 때의 상대 표정들이 압권이었다. 참담하고 애처로울수록 나는 극한 상황을 더 안쓰럽게 포장했다. ‘내가 더 힘들다! 너는 이런 삶을 모르지?’라는 분위기를 풍길수록 주변이 입을 다무는 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빨리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신문배달을 한창 할 때, 열아홉 살 동료가 있었다. 역시나 고시원에 사는 그에게 나는 위로는커녕 격려를 가장한 무용담을 늘어놓기 바빴다. 도시락 가게에서 제일 싼 반찬 하나를 사서 고시원에서 제공하는 밥으로 두 끼를 먹는다, 남은 라면 국물을 얼려놓으면 한 끼 해결이 가능하다는 둥의 밑바닥 인생 자랑하기는 그 친구의 한마디로 제동이 걸렸다. “반찬이 없어서요. 저는 그냥 밥을 간장에만 비벼 먹어요.”
진짜 가난이 묻혀 버리는 시대다. 가짜 가난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각자의 고통은 중요하다. 한 대라도 맞으면 아픈 거지, 두 대 맞은 사람 옆에 있다고 참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오늘날 너도나도 분출하는 ‘괴로웠던 지난날’은 가난의 사회구조적 문제를 짚어내는 동력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아무리 분투해도 삶이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지만 여전히 불굴의 인생역전 이야기가 부유하는 세상이다. 이때 극복기 작성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내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지옥에 있었다는 포석을 까는 것이 그나마 절망의 수위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 자신이 맞은 한 대가 강펀치였음을 집요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이유다. 모두가 힘든 사회에서 ‘더’ 힘든 고지를 선점하려는 역설이다.
그래서 간장만이 유일한 반찬인 사람이 목에 힘주고 떳떳하게 살 수만 있다면 다행이다. 실제는 두 대, 아니 열 대를 맞은 사람들이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상황인지를 모르고 그저 ‘요즘 사람들 다 힘든데 나만 유난 떨 수 없잖아’라면서 공손하기까지 하다. “너만 힘든 줄 아냐”는 주변의 빈정거림에 몇 차례 머쓱해진 상황을 경험한 자기 검열이다. 겸손의 끝에 열매가 맺어질 가능성도 매우 낮다. 어떻게든 삶이 나아질 가능성이 높은 한 대만 맞은 사람이 마치 모두가 같은 구렁텅이에 있었던 것처럼 ‘그 시절’을 운운할수록 ‘그런 삶이 영속적인’ 사람들은 더 비난받을 것이고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를 낮출 것이다.
사람들은 떠올리기 싫어하는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면 될 터인데 더 자주 입 밖에 내뱉는다. 강자가 될 수 없는 빌어먹을 양극화 시대를 버텨나가기 위한 안전장치가 필요해서다. 그래서 나는 아직 <기생충>을 못 보고 있다. 지하 고시원 방에서 보았던 거대한 바퀴벌레가 생각나서 슬퍼질 것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그걸 나를 포장하는 서사로 활용하여 타인의 겸연쩍은 시선을 보는 걸 즐길까 봐서다.
<오찬호 |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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