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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시선

[시선]평화의 사람

opinionX 2019. 6. 17. 11:06

나는 이희호 여사님의 생전에 그분을 뵌 적이 없다. 

지난 2018년, 나의 첫 감독 데뷔작인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김대중평화센터에서 주최하는 ‘김대중 노벨평화영화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이희호 여사님께서 “올해는 특별히 여성감독에게 이 상을 수여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시상식장에 직접 오셔서 시상을 하시기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오지 못하셨다. 평소에 존경하던 여사님을 추후에라도 뵙고 싶다는 의견을 재단 측에 전달하니 여사님을 뵈러 갈 때 동행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답을 들었다. 여사님을 직접 뵐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마음이 설레었다. 그러나 건강이 허락되시지 않아 여사님과의 만남이 계속 좌절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 나는 비보를 들었다. 

이후 며칠간, 나는 여사님의 삶의 행적에 관한 기사들을 SNS를 통해 읽고 또 읽었다. 

마침내 나는 그분의 빈소를 찾았다. 비록 돌아가신 후였지만 여사님과의 첫 만남이라는 생각에 가는 동안 내내 마음이 슬프고도 설레었다. 그리고 영정 속, 여사님의 환한 미소를 보았다. 이토록 삶으로, 죽음으로, 평화를 증거한 위대한 여성이 또 있을까. 

14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진 '故이희호 여사 추모식’에서 영정이 올려져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영정 앞에 서서, 여사님의 삶의 궤적을 잠시 그려보았다. 

전쟁 통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여성들의 고통을 머리와 가슴으로 받아내고, 서슬 퍼런 독재의 칼날 앞에 당당히 맞서라 독려하면서도 남편과 자녀들이 겪는 고통에 가슴에는 피멍이 들고, 고난으로 단련된 심장은 영부인이 된 후에도 정의를 향한 박동을 멈추지 않았다.

평생을, 정의에 대한 차가운 감각과 고통당하는 약자에 대한 뜨거운 심장을 동시에 지니고 사셨다. 그리고 마지막 가시는 길에 평생 간직하셨던 ‘평화’라는 선물을, 대한민국의 두 손에 유품으로 쥐여주셨다. 여사님의 생애는 고난과 기도로 점철된 십자가의 길, 그 자체였다. 

그분이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무척이나 닮아 있다. ‘평화의 길’은 곧 ‘십자가의 길’이라는 진리를 삶으로 증거하셨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6월12일 (출처:경향신문DB)

이 여사님은 자서전 <동행>에서 “남편이 차디찬 감방에 있는 기간에 홀로 기도하고 눈물로 지새운 밤도 많았다. 독재는 잔혹했고, 정치의 뒤안길은 참으로 무상했다. (중략) 참으로 먼 길을 걸어왔다. 문득 돌아보니 극한적 고통과 환희의 양극단을 극적으로 체험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회고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희호 여사님의 죽음으로, 분열이 극에 달해 있던 한국 정치권에도 요 며칠 잠시 평화의 기운이 감돈다. 남과 북 사이에도 잠시 평화가 깃든다. 가정에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평화가 깃든다. 대한민국을 가르고 있는 모든 분리된 선들이 잠시 사라진다. 

여사님의 영정 앞에 서서 나는 그렇게 몽상에 빠져들었다. 한낱 꿈일지 모르지만 이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스쳐 지나갔다. ‘평화의 사람’이 주는 영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명료하게 깨닫는 시간이었다.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런 분이 우리의 곁에서 호흡하시며 그 모든 역사의 풍파를 지켜보시며 아픔의 시대를 자식처럼 품고 기도하고 계셨구나, 우리는 그렇게 여사님을 재발견함과 동시에 떠나보냈다. 그리고 이제, 천국에서도 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시겠다는 이희호 여사님의 마지막 유언이 나에게, 우리 모두에게, 선물이자 거룩한 부담으로 남았다.

<추상미 |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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