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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모내기를 마쳤다. 우리 논에 와서 모를 심고 간 이앙기 주인은 도랑 옆에 기계를 대고 꼼꼼하게 흙을 씻어낸 다음, 창고에 이앙기를 넣었다. 마을 전체에 모내기가 끝났다.
모내기를 이렇게나 느지막이 하지 무렵에 하는 것은 밀 농사를 짓기 때문이다. 밀 가운데서도 토종밀은 그래도 조금 더 이르기는 하다. 어쨌거나 밀은 보리보다 더 늦고, “하루라도 더 논에 세워 가, 바짝 익혀야지” 하는 말씀처럼 가능하면 늦게 베는 게 좋아서, 밀 농사를 짓는 집이 모내기가 늦다. 십 년 전 이사를 와서 처음 농사를 배울 무렵만 해도 하지가 되어서야 모내기를 하는 집이 적지 않았다. 토종밀 농사를 짓는 집이 흔해서, 우리는 그저 이웃들 하는 대로만 따라 지었다.
게다가 우리집은 밀가루를 내는 방앗간 옆집. 6월 말이면 악양 곳곳에서 밀 가마를 실은 경운기들이 방앗간으로 모여들었다. 토종밀 농사를 두고 보자면 온 나라를 통틀어서도 보기 힘든 풍경이었겠지만, 이제 막 시골로 이사온 풋내기가 그런 걸 알 리가 있나. 남쪽 지방 이모작 농사를 짓는 마을은 으레 그러려니 했다. 깜깜한 여름밤, 개울가 방앗간은 알전구를 여러 개 켜 놓고, 가루를 빻았다. 쉬지 않고 밀 방아가 돌면, 한쪽으로는 20㎏짜리 밀가루가 도톰한 비닐봉지에 담겨 줄줄이 늘어선다. 다음날, 짐차에 실으려고 품에 안으면 그때까지도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던 것. 보드라운 밀가루가 손에 묻어나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삼 년 전에 마을 앞길을 넓힌다고 방앗간이 헐렸다. 그러고 나서 악양의 토종밀 농사는 눈에 띄게 줄었다. 방앗간이 있을 때는 밀을 방앗간에 팔 수도 있어서, 힘닿는 만큼 밀 농사를 지었던 것이, 방앗간이 사라진 다음에는 가루를 내기도, 내다 팔기도 어려워졌다. 아직도 토종밀 농사를 짓는 집은 손에 꼽는 정도. 그리고 비슷한 때에 나라 전체로도 우리밀을 사서 먹는 양도 줄어들고 있다.
‘농부시장 마르쉐’라는 장터가 있다. 서울에서 열리는 직거래 장터. 농사꾼이 직접 가판을 열고 농사지은 것들을 늘어놓는다. 제철 농산물로 만든 먹을거리도 팔고. 그리고 햇밀을 타작한 때에 맞춰서 ‘햇밀’ 장도 연다. 벌써 몇 해가 되었다. 농부가 직접 밀가루를 팔거나, 햇밀로 구운 빵이나, 밀가루 음식을 판다. 장이 열리는 것은 7월의 두 번째 일요일인 14일 혜화동.
밀이 다 익어가던 무렵에 마르쉐 일을 하는 이보은씨가 다녀갔다. 우리집 밀은 보자마자, “키가 작아서 콤바인으로 벨 수 있어요?” 한다. 벼나 밀이나 키가 너무 작으면 ‘클라스 콤바인’이라는 기계를 써야 하는데, 한눈에 그걸 알아보고 걱정했던 것. 다행히 간당간당하게 보통의 콤바인을 쓸 수 있는 키는 되어서 타작은 어렵지 않게 했다. 그리고 우리집은 옆집 방앗간이 사라진 뒤로, 몇 해 밀가루를 빻던 방앗간마저 갈 수 없게 된 처지였는데, 적당한 방앗간도 소개를 받았다.
며칠 전에 마르쉐 장터에서 빵을 구워 파는 분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올해 마르쉐 햇밀 장에 우리집 밀가루로 빵을 구워 팔고 싶다고 했다. 농사가 적어서 빵 가게에 낼 만큼 밀가루가 나오지는 않는데, 마르쉐 같은 자리가 있으니 이런 기회가 생긴다. 쌀이든 밀이든 그리고 커피도 마찬가지이고, 어떤 농산물이든 같은 품종이어도 농부가 있는 땅이 다른 만큼, 농가마다 서로 다른 농산물이 나온다. 농부시장 마르쉐에는 그걸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는 자리가 여럿 있다. 시작하는 농부들을 만날 수도 있다. 흔히 보게 되는 규모를 늘리거나, 신기술로 깜짝 놀랄 만한 농사를 지어서 주목을 받는 농부들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 애쓰고, 즐거워하는 농부들 말이다. 지난주에 밀가루를 빻아서 나눠 담고는, 날마다 햇밀 요리를 하고 있다. 부침개를 부치고, 수제비를 끓이고, 난과 치아바타를 굽고, 도넛을 튀기고. 한여름, 7월은 우리나라의 햇밀 제철이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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