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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논이 새파랗다. 손가락만큼 자란 밀 싹이 찬바람을 맞고 있다. 하지만 이웃 논들은 거의 비어 있다. 밀이나 보리를 심어서 푸른 논은 어쩌다가 하나씩 있을 뿐이다. 중부 지방에서는 겨울 농사 짓는 곳이 없으니, 겨울 들녘이 비어 있는 것이 자연스럽겠지. 하지만 이곳에서는 지난 십 년 사이 온통 푸르던 겨울 논에 밀과 보리를 심는 것이 해마다 줄어들었다.

십 년 전 시골에 왔을 때, 논농사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동네 이웃들이 짓는 것을 따라 지었다. 가을에 벼를 베고 나면, 다들 겨울 논을 비워 두지 않고, 밀이나 보리를 심었다. 그게 10년 전이었는데, 겨울 들판이 어디나 푸른 밀밭, 보리밭 그랬다. 그러다 정부가 하던 보리 수매가 중단되었고, 밀 계약 재배를 하던 기업체도 더 이상 밀을 사들이지 않았다. 밀가루를 빻던 방앗간도 하나 사라졌다. 그러고는 푸르던 평사리 겨울 들판도 텅 비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논은 여전히 밀농사를 짓고 있다. 토종밀, 흔히 앉은뱅이밀이라고도 하는 것. 밀농사에 대해서라면 마을에서 가장 신참인 내가 그나마 지금까지 밀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은, ‘봄이네 살림’이라는 블로그를 하면서 알게 된 지인들이 밀가루를 팔아주었기 때문이다. 토종밀로 빵을 굽는 것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는 ‘월인정원’ 같은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 논도 겨울 농사가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정말 운이 좋았던 덕분이고, 농사가 아주 적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 밀 타작을 하고 밀가루를 빻았던 날에는, 보들보들하고 따뜻한 밀가루를 하염없이 만지작거렸다. 갓 빻은 밀가루로 전을 부치고, 반죽을 밀어 칼국수나 수제비 따위를 해 먹었다. 집에서 빵을 구워먹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심지어 호떡 같은 것까지도. 정작 밀알이라고는 평생 본 적도 없었는데, 어쩌다가 직접 농사까지 짓게 되고 그걸로 음식을 해 먹으니 스스로도 더 특별한 경험으로 느꼈다.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고.

밀농사를 지으면서 좋았던 것은, 아이들이 마음껏 빵과 국수와 또 다른 밀가루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릴 때 아토피 증상이 꽤 있었던 큰아이는 시중에서 파는 수입 밀가루는 먹어서는 안되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집에서 농사지은 밀가루는 괜찮았다. 블로그를 통해 인연이 닿은 사람 중에도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가 여럿 있었다. 그러니까 흔히 밀가루가 문제라고 말하는 경우가 꽤 많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밀가루 자체가 문제는 아닐 수 있다는 걸, 지난 십 년 동안 밀농사를 지으면서 알게 되었다. 어떻게 농사짓는지, 가루를 내는지, 보관하는 동안 어떤 처리를 하는지 따위에 따라 같은 이름의 밀가루도 전혀 다른 음식이었다. 그리고 정말 맛이 좋다. 아마도 맛이 없었다면, 차라리 안 먹는 쪽을 선택했을지도 모를 텐데. 우리 밀이라고 다 입맛에 맞는 건 아니었는데, 직접 농사 짓는 토종밀만큼은 무엇을 하든 아이들이 좋아라 하며 먹는다.

해가 바뀌면서 들리는 가장 반가운 소식 중 하나가 정부에서 밀 수매를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35년 만이라고 했다. 밀이든 보리든 겨울 농사는 논농사만큼 손이 가지는 않는다. 그래서 겨울에 밀밭을 둘러보는 걸음은 일에 쫓겨 종종거리지는 않는다. 모내기하는 때나, 가을걷이할 때만큼은 일이 두 배인 셈이지만, 그래도 농사지은 것을 내다 팔 수만 있으면, 지금처럼 겨울 들판이 비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 밀이 사라지지 않게끔 애쓴 사람들이 있다. 나는 토종밀농사를 지켜오신 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옆집이 밀 방앗간이었고. 온 마을이 어디 드러내지도 않고 토종밀농사를 지어 왔다. 정부 밀 수매가 이런 사람들을 돕게 될 것이다. 여러 가지 잔뜩 쌓인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될 리는 없겠지만, 농사와 사람들 먹을거리에 대해서 이 정부가 이전과는 다른 정부라는 것은 분명하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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