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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지난해 가을 개봉했던 다큐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기획할 당시, 난 산후우울증에서 비롯된 우울증상을 장기간 겪고 있었다. 대인기피증으로 외출도 쉽지 않았지만 죽기 살기로 몸을 일으켜 영화 소재를 찾아다녔다. 마침 후배가 일하는 출판사에서 한국전 당시 폴란드로 갔던 북한 전쟁고아들의 행적을 다룬 실화소설을 만났다. 1500명의 한국 고아들을 같은 전쟁의 상처를 지닌 폴란드 교사들이 사랑으로 품은 스토리다.

나는 극중 내레이션에서 이들을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표현한다. 교사들의 유년 시절은 참혹했고 6년간 지속된 홀로코스트를 경험했다. 시체 무더기를 밟고 학교에 가야 하고, 포탄 속에 가족이 죽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 상처가 매개가 되어 폴란드 교사들은, 한국 고아들에게 자신들을 ‘엄마, 아빠’라고 부르도록 한다. 아이들을 자신의 일부로 여기고 진심 어린 공감과 연민을 베풀었던 폴란드 교사들의 마음,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와 가장 닮은 성품(性品)은 단 하나, 모성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중 한 장면. 배우 추상미가 감독을 맡았다. 커넥트픽쳐스

지난 시간 나는 혹독한 모성의 입문과정을 치렀다. 엄마가 되는 일이 왜 그리도 힘이 들었을까? 독립된 주체로서의 자유로움과 필연으로 얽어매진 사랑 사이에 밀고 당기기를 하며 분열적 감정에 시달렸다. 산후 우울증은 엄마가 되어가는 과도기에 치른 홍역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여기엔 특별한 것이 있었다. 드라마 속의 아이가 울면 내 아이의 모습이 투영되어 같이 울고, 아동 관련 사고 소식이 나오면 뉴스를 아예 껐다. 그러던 어느날 유튜브에서, 피골이 상접해 산천을 헤매고 다니는 북한 꽃제비 아이의 영상을 보고, 탄식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 경험은 운명처럼 나를 북한 전쟁고아를 품은 폴란드 교사들의 스토리에 몰입하게 했다.

어느 페미니스트 학자는 가부장제를 위해 이용되었던 모성의 역사를 비판하고 모성이라는 단어에 처음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심었다.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서며 무한경쟁의 분위기 속에서 모성은 점차 왜곡되어 간다. 자녀들을 대를 이어 상류층에 편입시키려는 엄마들의 무서운 정신을 그린 드라마 <스카이캐슬>을 보라! 이 무서운 엄마들을 양산한 사회구조적 문제가 분명히 크겠지만 오로지 그 탓만은 아닐 거라 추측해본다. 상처 입은 모성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여자에서 엄마로의 과도기를 거치며 존재의 불안정성에서 오는 상처를 대면하지 못한 원인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다행히도, 극악한 엄마가 될 수 있었던 나의 여정은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내 아이에 대한 시선이 역사 속의 아이들과 꽃제비에게로 확장되었을 때, 좋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소소한 작품이 하나 세상에 나왔고, 우리 아들은 이전보다 훨씬 잘 자라고 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상처 입은 치유자가 아닐까? 그녀들의 모성은 품 안의 새끼들이 하나둘 떠나가도 그 자리에 남아 맴돈다. 엄마의 통제를 떠나려는 아이의 등 뒤에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버텨내는 엄마도 있지만, 씁쓸함은 남는다. 그러나 이때 비로소 그녀는 진정한 엄마가 되는 게 아닐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을 주고 자신은 온전히 비워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진정한 성숙의 순간이 아닐까? 그리고 이제, 갈고 닦여진 모성이라는 무기를 세상을 향해 휘두를 때가 온 건 아닐까. 연민과 공감능력을 갖춘 이 엄마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자들이 아닐까. 사회의 갈라진 틈을 메우고, 찢어진 곳을 꿰매며, 사회의 불의를 부드럽게 꾸짖고, 양극단을 화해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대한민국의 엄마들이 스카이캐슬을 뛰쳐나와 모성이 필요한 세상 곳곳에서 타인의 엄마가 되어 줄 그날을 상상해본다.

<추상미 |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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