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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좌우로 흔들린다. 중력이 비껴가는 것이 느껴진다. 경광등 불빛과 사이렌 소리가 눈과 귀를 파고들다 튕겨져 나간다.
새벽 한 시. 어머니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달려갔다. 아버지 연세는 78세.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나이. 저혈당 쇼크. 구급차에서 내려 응급실로 이송 중이다.
의사와 간호사가 다급하게 아버지와 링거를 연결한다. 아버지 팔뚝이 링거의 수액을 들이켠다. 10에서 200으로 혈당수치가 치솟는다. 위급한 상황이 지나갔다.
안내에 따라, 응급실 옆 조그마하게 붙어 있는 수납·입원 창구에서 종이 한 장을 받아든다. 통장 비밀번호든, 숨기고 싶은 치부든 적으라고 하면 적을 태세다.
환자의 성명, 주민등록번호, 성별. 그리고 살고 있는 집이 자택인지 전세인지 아니면 월세인지를 묻는다. 바로 아래 칸에선 환자의 직장명과 직장 전화번호도 기다린다.
정신이 돌아온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상대가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본능이 각성한다. 여긴 병원이고 나는 입원약정서를 쓰고 있다. 법과 제도를 따르지 않으면 환자와 보호자를 혼내주겠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신경이 바짝바짝 곤두선다. 입원약정서가 채무이행각서로 보인다. 병원이 불법을 저지르겠는가. 병원 법조팀에서 충분히 검토했을 터. 하지만 아픈 가족이 볼모가 되어 무언가를 강요당하는 느낌이랄까. 아픈 게 죄라면 죄겠지.
약정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봤다. 여러 개의 사전에서 약정이 약을 달이는 기구라는 의미가 아닌 이상, 어떤 일을 약속하여 정하는 행위라는 공통된 의미로 해석된다. 그럼 약속이란 무엇인가. 어린이 백과사전을 찾아봤다. 서로 어떤 일을 정해 놓고 어기지 않기로 다짐하는 일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다짐이다. 환자가 병원에, 병원이 환자에게 하는 약속. 입원약정서에는 병원이 환자에게 지켜야 할 약속이 안 보인다.
나는 환자를 위해 내 의무를 다하는 데 있어 나이, 질병, 장애, 종교, 인종, 성별, 국적, 정당, 성적 성향, 사회적 지위 등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고 알게 된 환자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다는 나이팅게일 선서를 빌미로 의사와 간호사를 탓하고 싶지 않다.
어디 이런 문제가 의사, 간호사의 문제겠는가. 관행으로 쌓여온 병원시스템일 테고,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권위주의적 문화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겠지. 나와 우리 모두의 유산 아니겠나.
환자와 그 가족의 편에 서서 생각하고 행동해주는 병원 관계자가 좀 더 많았으면 하는 환자와 그 가족의 작은 바람이 부담스러운 시선으로 병원을 맴돈다.
다급할 때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곳에서 날아오는 시선. 유쾌하지 않은 시선이었다.
다행히 해가 뜨기 전에 입원실로 자리를 옮겼다. 아버지는 곤하게 주무신다. 오늘 아침 일어나시면 적지 않은 검사를 받으셔야 할 것이다. 몸은 좀 피곤하지만, 어찌 됐건 시간은 흘렀고 모든 것이 안정감을 되찾은 느낌이다.
이제 지방의 강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새벽기차를 타야 하는 나에게 남은 미션은 병원을 나서는 일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야간 당직 간호사가 뒤에서 부른다. 나지막한 소리로 묻는다. 환자분 실비보험은 있으시죠. 물어보는 이도 어딘가에 적어 놓아야 하기 때문에 마지못해 물어보는 것일 게다.
마지막까지 전해오는 시선. 이보다 확실한 졸음방지약이 또 있겠나. 다행히 졸지 않고 집까지 잘 도착했다.
<최정묵 |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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