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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이 지났을 뿐이다. 그날, 나와 아내는 젖먹이 아기를 옆에 뉘어 놓고 소식을 들었다. 일본에 대지진이 나고, 쓰나미가 바닷가 도시를 덮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사라졌다고 했다. 그리고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터졌다고 했다. 소식들은 비현실적이었다. 며칠이 지나서, 후쿠시마의 한 농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가 없었다고 했다.

지난달 갑작스럽게 단체 대화방에 초대되어 들어갔다. 마을에서 얼굴 한번 봤다 싶은 사람, 건너서 이름 한번 들었던 사람, 그 모든 사람들이 단체 대화방에 들어와 있었다. 십리 벚꽃길이 흐드러지는 하동 화개 골짜기에 댐이 들어선다고, 사람들이 이 일을 어쩌냐며 모였다. 몇 해 전부터 구례 지리산 계곡에 댐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워서 계속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 화개로 옮겨온 것인가 했는데, 그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양수발전소라고 했다.

양수발전소는 산 아래와 꼭대기 양쪽에 댐을 짓는다. 밤에 전기가 남으면 펌프를 돌려 물을 끌어올린다. 그래서 밤에 전기가 남아야 제 구실을 한다. 밤에 그 많은 물을 산꼭대기로 끌어올릴 만큼 전기가 남는 것은 핵발전소 때문이다. 핵발전소는 일단 한번 돌리기 시작하면, 쉽게 끄기 어렵다. 켜 있는 동안은 출력을 조절하는 것도 어렵다. 발전기는 돌아가는데 쓰지를 않아서 전기가 많이 남는 것도 좋지 않다. 그래서 밤에 전기가 남는다고 아우성을 한다. 양수발전소가 핵발전소를 떠받치는 한쪽 기둥 같은 일을 하는 셈이다. 둘의 관계가 이런 식이어서 전기를 만드는 비용인 핵발전 단가를 계산할 때, 아예 양수발전 단가까지 포함해서 계산하는 학자도 있다. 한동안 난방용으로 심야전기를 값싸게 공급했던 것도 비슷한 까닭이다. 원전이 특히 많은 나라인 프랑스의 전력공사는 심야전기로 난방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냉방까지도 장려한다.

화개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동에 사는 많은 이들이 모여서 군청과 군의회에 일의 앞뒤를 따져 묻고, 주민들이 이것을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핵발전과 양수발전의 관계 때문은 아니었다. 언제나 첫손에 꼽히는 뾰족한 녹차 잎, 이제 아흔 살 가까운 나무들이 늘어서 만발하는 벚꽃길, 그사이 지리산 골짝에서 내리는 계곡. 이런 것들에 기대어 살아가는 삶터가 쑥대밭이 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모여 사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뜻을 모은 덕에 하동군이 양수발전소 사업을 ‘포기’한다는 결정이 나왔다. 화개는 12년 동안 계속되었을 공사판에서 벗어났고, 집터 위에 커다란 물웅덩이를 놓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칼끝을 걷듯 벼렸던 마음을 쓰다듬으면서, 봄나물을 뜯으러 가고,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느라 바삐 농사 연장을 집어들었다.

핵발전소를 머리에 이고 사는 한, 이런 일은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양수발전소도 하동에서만 짓지 않기로 한 것일 뿐, 여전히 경기 가평, 양평, 포천, 강원 홍천, 충북 영동, 경북 봉화, 전남 곡성이 후보지에 올라 있다. 이 가운데 3곳을 정해서 큰 댐을 지어 양수발전소를 건설할 예정이다. 핵발전소는 후쿠시마 같은 재앙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삶터를 제멋대로 짓밟고 있다. 전국을 돌며 후보지를 정하고, 적당히 사람들을 편가르기 하고, 온갖 소문을 퍼뜨려서 사람들 삶을 제 입맛대로 쥐락펴락하고 있는 한국수력원자력도 핵발전소를 돌리느라 이런 일을 멈추지 않겠지.

2011년, 유서 한 장 남길 수 없었던 농부의 소식을 듣고, 핵발전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마음의 빚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을 조금은 덜 수 있도록, 작은 것이지만 독일 쇠나우에서 펴낸 자료 <핵발전을 반대하는 합당한 이유 100가지>를 번역해서 나누게 되었다. 젖먹이였던 아이는 이제 초등 2학년이다. 이 아이가 살아가는 동안, 부디 후쿠시마 사고와 같은 소식을 더 이상 듣지 않기를, 언젠가 원전이 없는 평화로운 삶을 살게 되기를.

<전광진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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