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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4세기에 어느 논문에서 여성의 이빨 개수가 남성보다 적다고 썼다. 이데아에 매달린 플라톤과 대조적으로 감각적 인식을 복권시키면서 서양 과학의 토대를 놓았다고 평가되는 그 위대한 철학자가 남녀의 이빨 개수가 다르다고 주장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어쩌면 당시에 여성들의 영양 상태나 치아 관리가 부실해서 이빨이 더 많이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객관성을 중시하는 학자라면 제대로 조사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는 사실을 확인하기보다 자신의 추측에 안주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서양에서 그의 견해가 거의 2000년 동안 그대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16세기 중엽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에서 그 오류를 지적하기까지, 직접 이빨을 세어볼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냥 입만 벌려서 확인해보면 곧바로 판명되었을 텐데, 그 오랜 세월 동안 모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류에 갇혀 있었다. 마치 천체망원경으로 별들을 정밀하게 관찰하지 않고 수평선 너머로 항해를 나서지 못하면서 천동설만 굳게 믿고 있었던 것처럼.

근대 과학은 중세까지 이어져온 무지의 굴레를 거세게 허물어뜨렸다. 지난 2, 3세기 동안 인류는 자신과 만물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획득해왔다. 그 덕분에 생활은 날로 편리해지고 신체적 제약과 물리적 한계는 빠르게 극복되고 있다. 그런데 이토록 ‘멋진 신세계’에서 우리의 의식도 함께 향상되고 있는가. 우리는 충분히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가. 그렇지 않은 듯하다. 현대인들이 소비나 투자 등의 경제행위에서 합리적으로 자기 이익을 좇기보다는 마음의 습관이나 집단적 충동에 더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행동경제학이 설득력 있게 증명한다. 사람이나 집단들 사이의 대립도 명료한 의견보다는 맹목적인 감정의 충돌인 경우가 많다.

지식의 증가가 인간을 몽매로부터 구원해주지는 못한다. 일찍이 아인슈타인은 ‘이 세상에 무한한 것은 우주와 인간의 어리석음 두 가지밖에 없다’고 했는데, 첨단 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 해도 그 통찰은 수정되기 어려울 듯하다. 자신의 선입견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대상을 지각하는 ‘확증 편향’은 여전하다. 우리는 실체와 본질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기보다는 이미 갖고 있던 관념이나 이미지를 현실에 덮어씌우려 할 때가 많다. 후쿠시마의 대재앙을 똑똑하게 보면서도 원전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명백한 반증 자료가 제시되어도 견해를 절대로 굽히지 않는다.

투입 대비 산출의 효용이 높으니 경제적이라는 논법은 사고가 터지기 전까지는 맞다. 언젠가 치러야 하는 엄청난 폐기물 처리 비용도 감추어두기에 더욱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계속 은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리얼리티는 결국에 피할 수 없는 진리를 드러내고야 만다. 최근 들어 연거푸 터지는 안전사고들도 그 배경을 뜯어보면, 사물의 엄연한 이치를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한 혐의가 드러난다. ‘설마…’라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위험 요소들에 눈을 감게 하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무사(無思), 안일, 무책임, 탐욕, 자기기만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아찔한 환풍구의 높이. 안전하다고 흔히 생각하는 곳에 위험이 도사린다. (출처 : 경향DB)


한국인들은 이런저런 사소한 일들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불안해하면서도 정작 걱정해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온갖 것들에 불만이 가득하면서도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에 너무 쉽게 만족한다. 그리고 타인이나 사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지만, 사회적 관행을 너무 신뢰한다. 비슷한 사고가 되풀이되는데도 이 정도쯤이야 괜찮겠지 하면서 생활의 구조나 제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관념이나 습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떠도는 정보들을 입맛대로 선택하고 편집하면서 자기(들) 나름의 허구를 견고하게 구축한다. 그 결과 믿음이 지식을 대체한다.

정보와 지식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사물과 세계에 대한 단순한 이미지에 갇히기 쉽다. 네트워크의 발달로 견해들의 유유상종이 쉬워지면서 엉뚱한 믿음을 서로 정당화하기 일쑤다. 이빨 개수의 오류나 천동설은 인류를 불행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기술과 시스템이 삶을 에워싸는 위험사회에서 통념과 믿음은 재난이 될 수 있다. 정말로 그럴까 하고 의혹을 제기하면서 조목조목 짚어보는 것은 사회적 신뢰를 쌓아가기 위한 미덕이 될 수 있다. 의문은 진정한 앎의 씨앗이 된다. ‘의심과 믿음을 함께 참작하여, 그 끝에 얻은 지식이 참된 지식이다(一疑一信相參勘 勘極而成知者 其知始眞).’(<채근담>)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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