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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별로 인터넷 게시판 댓글을 비교 조사한 결과가 있다. 악플 대 선플, 즉 부정적 댓글과 긍정적 댓글의 비율이 나라별로 극명한 대비를 보였다. 한국은 악플 대 선플이 4 대 1인 반면, 이웃 일본은 정반대로 1 대 4였다. 북구의 강소국 네덜란드는 1 대 9에 달했다. 한국의 악성 댓글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김찬호 교수가 우리 사회 감정의 생태계를 입체적으로 분석한 <모멸감>(문학과지성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사이버 공간이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면, 우리 사회의 적대감은 실로 우려할 만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김찬호 교수는 이어 201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세계 36개 선진국을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한 결과, 그리고 2005년 미국 브래들리대에서 전 세계 53개국 1만7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개인의 자부심’ 비교 연구를 소개한다. 여기서도 한국인의 어두운 자화상이 두드러진다.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27위에 머물렀고, 자부심은 44위에 그쳤다. 김 교수는 ‘묻지마 범죄’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적의(敵意)가 낮은 행복감, 낮은 자존감과 직결돼 있다고 분석한다.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지 못하기 때문에 감정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지 못한 채 기우뚱거린다. 과잉과 결핍 사이를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낮은 자존감, 끊임없이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낮은 자존감은 상대적 박탈감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 같은 감정은 열등감과 울화로 이어지고, 이것은 다시 절망, 좌절, 무기력, 공포, 불안, 우울감 등과 뒤섞여 강력한 인화성 물질로 돌변한다. 자존감의 결핍이 뇌관이다. 낮은 자존감이 건드려지면 폭발한다. 불특정 다수를 향해, 또는 특정한 그 누구를 향해, 아니면 자기 자신을 향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른 것일까. 압축적 근대화를 뒤덮어버린 신자유주의의 세계화가 문제의 핵심일 것이다. 돈의 논리가 모든 가치 기준을 제압한 결과 개인과 사회가 이토록 왜소해졌을 것이다. 경제성장만이 유일한 살길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사회적 합의를 거쳐 개인의 내면에 뿌리를 내렸다. 1등만이 살아남는 사회, 나머지는 ‘루저’로 낙인찍히는 사회. 피로사회, 불안사회, 중독사회, 자기계발 사회 등 한국 사회에 대한 새로운 명명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서적 '감정의 인문학' (출처 : 경향DB)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한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감정이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폭발물에 대해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이성과 합리가 근대성(모더니티)의 엔진으로 자리 잡은 이래, 감정은 화물(이차적 존재)로 밀려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성이 남성중심주의, 과학기술 패권주의, 경제 지상주의라는 강력한 엔진을 연거푸 장착하는 동안 감정은 거추장스러운 것, 이성에 의해 언제든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감정은 관리되지 못했다. 우리는 아직 자기 감정의 주인이 아니다.

김찬호 교수는 ‘의식되지 않은 무의식은 곧 운명이 된다’는 카를 융의 말을 앞세워 한국 사회의 지배적 감정을 해부한 뒤, 모멸감을 해소시켜야 인간의 존엄이 가능해진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제 인정하자. 우리의 주인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시대정신의 속살은 ‘시대 감정’일 것이다. 관점(觀點)의 시대에서 감점(感點)의 시대로 넘어가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하나의 관점이기 이전에 무수한 감점이다. 감점(감성)의 재발견은 경제논리를 생명논리로, 힘의 논리를 상생의 논리로 대체하는 일대 전환이 아닐 수 없다.

범죄심리학만큼 자존감을 중시하는 분야도 드물 것이다. 자존감이 훼손됐을 때, 다시 말해 누군가로부터 무시당했을 때 우리는 폭발물로 둔갑한다. 감정은 모욕과 경멸을 견디지 못한다. 우리의 감정은 이성으로부터, 과학기술로부터, 돈의 논리로부터 끊임없이 무시당해왔다. 감정을 구출해야 한다. 이성의 오만으로부터 감정을 되찾아오는 사회적 노력이 절실하다. 온전한 감정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의 껍데기가 된 이성, 돈의 포장지가 된 합리주의를 벗겨버리자. 우리는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아니다. 우리는 원래 호모 센티멘털리스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의 감정이 공공성의 비옥한 토양이 되어야 한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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