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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 | 우리땅걷기 대표·문화사학자



남원시내 뒤편에 우뚝한 산이 하나 있다. 남원의 진산 교룡산이다. 고즈넉한 산을 천천히 올라가면 선국사라는 절이 있다.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가 고향인 경주 일대에서 유학자들이 핍박하자 피신해 8개월여 머문 곳이 이 절의 은적암이다. 동학의 주요 저서를 지은 곳이기도 하다.


어느 날 노스님 한 분이 수운이 거처하는 은적암을 찾았다. 스님의 이름은 송월당(松月堂)이었다. 


수운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서, 그와 담론을 즐기기 위해 찾아온 송월당 스님은 수운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선생은 불도(佛道)를 연구하십니까?” 


수운이 답하기를, “예, 나는 불도를 좋아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면 어찌하여 중이 되시지 않았소?” 


“중이 아니고서도 불도를 깨닫는 것이 좋지 않소?” 


“그러면 유도(儒道)를 좋아하십니까?” 


“나는 유도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유생(儒生)은 아닙니다.” 


“그러면 선도(仙道)를 좋아합니까?” 


“선도를 하지는 않지만 좋아하기는 하지요.”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씀입니까?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아무것이나 다 좋아한다 하니 그 말의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수운이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두 팔 중에 어느 팔을 배척하고 어느 팔을 사랑하는지요?”


노승은 그때서야 그 말의 뜻을 깨닫고서, 


“예 알겠습니다. 선생은 몸 전체를 사랑하는 분이시군요!”라고 했다. 


수운은 그의 말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오직 우주의 원리인 한울님의 도, 바로 그 천도(天道)를 좋아할 뿐입니다.” 


노스님은 감복하여 한참 동안 말을 잊고 있었다.


훗날 제자들이 노승에게 왜 도를 전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수운은 “이미 물든 종이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지 못하나니, 노승은 이미 물든 종이라. 건지려면 찢어질 뿐이니 그대로 두는 것이 도리어 옳지 않으냐”고 하였다. 


이들의 담론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종교가 다르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인정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방법을 이르는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이 있듯 아무것도 물들지 않은 깨끗한 종이에 새로운 세상을 그려가라는 것이다. 

진영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이 2차 인선 결과 발표 (경향신문DB)


새로 출범하는 정부를 이끌어갈 각료들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이미 발탁된 사람이나 앞으로 남은 자리에 발탁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물든 종이일까, 깨끗한 종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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