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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이 더 이상 수세에 몰릴 경우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은 현실이다. 아직은 큰 가능성은 아니지만 침공 초기에 비하면 훨씬 커졌다. 도네츠크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4개 지역을 병합하고 투표를 통해 합병 찬성을 받은 것은 언젠가 있을지 모를 핵무기 사용을 위한 사전 포석의 성격을 가진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이 러시아에 대한 직접 공격이고 자위권 차원에서 핵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강변할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북한의 김정은에게 핵 개발을 지속할 기회와 이유를 동시에 제공했다. 온통 우크라이나에 시선이 쏠린 사이 북한에 대한 감시의 눈길은 느슨해졌고, 복수의 서방 언론은 북한이 러시아에 무기를 팔고 있을 뿐 아니라 5만명 수준의 북한인을 러시아군에 참전시킬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이것이 기회라면 핵 개발을 지속할 이유도 한층 더 분명해졌다. 1994년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는 핵탄두 1700개를 보유한 세계 3위의 핵보유국이었다. 소련 붕괴 이후 미국·러시아·영국과 맺은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에 따라 핵탄두를 모두 러시아에 이전했고, 그 대신 서방이 안보를 책임지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양해각서의 당사자인 러시아가 크름반도를 강제 병합하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해도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우크라이나가 그냥 핵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도 러시아는 그리 쉽게 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원래부터 김정은은 핵 개발을 중도 포기하고 결국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 이라크의 후세인과 리비아의 카다피 사례를 깊이 새겨왔다고 알려져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절대 핵 개발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생긴 셈이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며칠 전 ‘아마겟돈’을 거론하며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60년 만에 핵전쟁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다고 말한 바 있다. 백악관은 서둘러 이 발언을 거둬들이고 있지만, 과장되었을망정 아무 근거 없는 발언이었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일촉즉발이라는 표현으로도 충분치 않은 첨예한 위기였다. 무기를 실은 소련의 배는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150㎞밖에 떨어지지 않은 쿠바 미사일 기지를 향해 오고 있었고,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데프콘 2를 발령했는데, 이에 따라 튀르키예에 주둔한 미군 전투기는 파일럿 개인의 판단에 따라 언제든지 출격해 모스크바에 핵폭탄을 터뜨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미국은 모르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쿠바 미사일 기지에 이미 100개 넘는 핵탄두를 배치해놓고 있었기 때문에 케네디나 흐루쇼프가 아닌 누구라도 한 사람만 잘못 판단하면 핵전쟁이 시작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분석한 <결정의 본질>이라는 책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하버드대학의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는 2012년 쿠바 사태 50주년을 맞아 새로 쓴 기고문에서 우리에게 뼈아픈 질문과 충고를 던진다. 질문은 이것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한 번으로 끝났는데 왜 북핵 위기는 수십 번 되풀이되고 있는가?” 

그의 답은 한국과 미국이 모두 북한에 대해 채찍은 없이 당근만 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충고는 이것이다. “당근은 채찍과 함께할 때 효과를 발휘한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케네디 대통령은 누군가의 실수로 핵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데프콘 2를 발령했다. 위험이 커져야 위협이 먹혀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최근 랜드연구소와 아산정책연구원이 함께 발간한 보고서는 북한의 핵위협과 한·미 동맹의 억제능력 사이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을 심각하게 지적했다. 얼마 전 CNN의 분석기사는 심지어 수십 년간 한 번도 진지하게 제기되지 않았던 제2의 남침 가능성조차 거론했다. 북한이 수차례에 걸쳐 ICBM 발사에 성공한 마당에, 당장은 아니라 하더라도 2050년의 미국 대통령이 남한을 지키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희생하지는 않겠노라고 결정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핵위협과 억제력 사이에 더 이상 격차가 벌어지기 전에 북한이 넘어서는 안 될 레드라인을 각인시켜야 한다. 흐루쇼프가 그랬던 것처럼 김정은도 어느 지점에서는 겁을 먹고 물러서게 할 수 있는 채찍 말이다. 그러려면 케네디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스스로를 더 큰 위험에 노출시키는 결단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란을 보면 종래에는 아마겟돈을 피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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