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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대한 국내 반응은 ‘배신’이라는 한 단어로 모아지는 듯하다. 때로는 동맹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살벌한 표현도 들린다. 친환경 전기차에 주어지는 7500달러 보조금에서 당장 한국산 차가 배제되게 생겼고, 이것은 결국 한국산 전기차의 가격이 1000만원이나 비싸지는 셈이 될 것이라서 미국 내 전기차 판매 2위인 현대차·기아는 물론이고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 경제 전체에도 커다란 부담인 것이 사실이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미·중 대립에서 한국은 분명하게 미국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조 바이든 대통령 방한을 전후해 현대차 100억달러와 삼성전자 170억달러 등 한국 기업들의 대대적인 미국 내 투자 약속까지 이어진 직후임을 감안하면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야당은 정부의 무능을 조롱하고 나섰고, 영국을 거쳐 미국을 방문 예정인 윤 대통령으로서는 빈손으로 귀국할 경우 또 한 번의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됐다.

그런데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인식은 앞에 요약한 우리의 인식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에게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전기차 보조금에 대한 법이라면, 미국 내에서 이 법은 바이든의 대선공약이었던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 정책의 축소판이다. 전체 법안은 법인세 인상, 처방약 가격 인하, 국세청(IRS) 개혁, 건강보험 보조금 연장, 에너지 안보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투자 등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중시하는 전기차 보조금은 다섯 번째 항목의 한 부분일 뿐, 전체적으로는 중산층을 위한 대대적인 사회투자 프로그램이다. 전기차 보조금은 외국 기업들로 하여금 미국 내에서 생산해야 할 인센티브를 높이기 때문에 미국 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중산층 보호라는 반박하기 힘든 사회적 명분에 슬쩍 얹혀 있는 모양새다. 11월 미국 중간선거까지 기다리고 있으니 빠른 시일 안에 이 명분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막상 인플레이션 잡는 데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되거나 심지어 역효과일 것이라는 경제학자들의 전망이 수없이 나와 있으나 이 또한 아무도 신경 안 쓰는 분위기다.

국제사회에서 이 법은 첫째로 미국이 마침내 기후변화에 맞서기 위한 국제적 공동 대응에 적극 동참한다는 뜻이고, 둘째로 이미 안보 무기가 되어버린 국제적 공급망 재편에 대대적으로 나선다는 뜻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 전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탈퇴했던 파리 기후변화협약에 다시 가입했고 이번에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해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청정에너지 산업에 대대적으로 투자함으로써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50~52% 감축한다는 파리 협약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어차피 전기차 생산과 무관한 대다수 국가들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이다. 급속하게 팽창해온 중국의 일방주의적 태도와 산업 기밀 유출, 코로나19로 인한 국제 공급망 마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러난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 등은 세계 각국이 동맹을 중심으로 한 공급망 재편에도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피해를 보게 된 EU, 일본, 브라질은 ‘배신’이나 ‘등에 칼’ 같은 자극적 반응보다는 WTO를 통한 조용한 문제 해결 쪽으로 방향을 잡는 모양새다.

남는 것은 대한민국의 장기적 정책역량에 대한 걱정이다. 지금 겪는 어려움은 거의 다 예측하고 있었던 것들이다. 팬데믹이 처음 시작됐던 3년 전에 이미 전 세계 전문가들은 경제의 블록화와 자유무역의 퇴조, 세계적인 유동성 과잉 공급에 따른 대대적 인플레이션과 부채 쓰나미를 한목소리로 예측했다. 한국의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이 미국의 정책금리 인상을 끌어낼 것이고, 이것은 각국 정부의 이자비용을 높이면서 재정여력을 줄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확장적 재정정책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이미 여러 전문가들이 내놓고 있었다. 지금 겪는 어려움은 이미 2~3년 전부터 예측하고 있었던 것인데, 문재인 정부는 재정확장 일변도의 길을 갔고 윤석열 정부는 수습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장기적 정책역량 부족이 국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데, ‘배신’이니 ‘등에 칼’이니 하는 자극적 언사가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정쟁이 가져오는 최악의 결과는 정책을 근시안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장기적 정책역량 복원에 힘써야 할 때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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