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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채 |경제 에디터
 

1995년 1월17일 새벽. 효고(兵庫)현을 중심으로 한 일본 간사이(關西) 지역에 규모 7.2의 강진이 강타했다. 당시 현지 취재에 나섰던 필자는 지진의 참혹상을 첫 체험했다. 옆으로 기운 고가도로, 종잇장처럼 우그러진 대형 건물, 형체를 알 수 없는 목조가옥. 그리고 그 밑에 파묻힌 생명. 지진 발생 뒤에는 며칠째 규모 5~6의 여진이 이어졌다. 땅울림의 괴이함은 체험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는 두려움이었다.

훗날 한신(阪神) 대지진으로 이름 붙여진 이 지진으로 6400여명이 사망했고 14조엔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했던 2002년 봄. 일본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이 지진 대피요령을 교육받고 돌아와 짐짓 아는 체를 했다. “책상 아래로 몸을 숨기고, 가스밸브를 차단하고, 탈출구를 확보하고….”

일본에서 지진은 다반사다. 사람이 체감 못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하루 300건이 발생한다. 지진과의 공생인 셈이다. 규모 8 안팎의 대지진이 “언제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얘기는 너무도 흔했다. 2008년 도쿄를 떠날 때 지인들은 “비겁하게 혼자 내뺀다”며 ‘남겨진 자’의 불안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지난 11일. 긴급 속보로 전해지는 도호쿠(東北) 대지진은 입을 다물게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 그리고 이어진 초대형 쓰나미. 도호쿠 지역 해안가 마을이 통째로 유린됐다. 육지에 있어야 할 자동차가 물위로 떠다니고, 바다에 있어야 할 배가 육지에 처박혔다. TV 화면으로 생중계되는 쓰나미 현장은 공포와 전율이었다. 잘 알고 지내는 일본 언론사의 한 기자는 “어머니가 도호쿠 지역 이와테현 출신”이라며 “그쪽에 외가 친척이 많은데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안절부절못했다.



“이웃에서 도와주면 큰힘 될 것”

지진 발생지에서 400㎞ 떨어진 도쿄는 교통과 통신 두절로 수백만명이 걸어서 움직였다. 유·무선 전화가 모두 끊긴 채 인터넷 메신저에 의존하던 후배 특파원은 “건물이 흔들려요. 집기가 떨어집니다. 엘리베이터가 서고, 스프링클러가 터졌습니다. 기사를 보내야 하는데, 어떡하지요”라며 다급함을 전했다. 규모 8에도 끄떡없다고 자랑하던 최신 건물이었다.

지진 발생 사흘이 지나면서 대형 쓰나미는 해제됐지만 이번에는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 유출과 폭발로 이어지고 있다. 지진과 핵. 일본인에게 잠재된 두 가지 트라우마가 동시에 발현된 셈이다.

지금까지는 일본 특유의 침착함이 유지되는 듯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다. 쓰나미가 빠지고 대재앙의 피해가 구체화되면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 다가올 게 뻔하다. 복구 엄두가 나지 않는 피해지의 상황, 쓰나미가 할퀴고 간 지역에서 발견될 수많은 시신들은 일본인 모두에게 잿빛 기억이 될 수밖에 없다. 살아남은 자에게 그 충격은 평생 갈 것이다.

이런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젊은층이 주로 이용하는 트위터 등의 공간에는 희망과 용기를 잃지 말라는 얘기가 쏟아지는 분위기다. 과거 한신 대지진 때 정부 차원의 지원과는 달리 이번에는 민간 차원의 지원도 활성화되는 것 같다. 지인으로 이병헌씨의 광팬이기도 한 일본인 모리 교코는 “한국을 자주 찾는데 너무 친절하게 대해줘 참 좋다. 이웃에서 도와주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들도 움직였으면 한다. 이번 사태로 일본 산업은 궤멸적 상황에 놓였다. 도요타, 혼다 자동차의 가동이 중단됐다. 소니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 제2의 제철소이자 세계 5위인 JFE의 지바제철소 등도 큰 피해를 입었다. 일본 동북부에 위치한 부품 소재 산업 피해는 말할 것도 없다. 소니를 롤모델로 삼아온 삼성전자, 미쓰비시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은 현대자동차, 신일본제철을 목표로 했던 포스코 모두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것도 방법이다.

굳이 과거사를 떠올릴 필요 있나

일본 참의원에 야마모토 이치타(山本一太)라는 의원이 있다. 일본의 국제적 역할을 강조하는 우파적 성향을 갖고 있지만 전후세대로 한·일교류에는 적극적이다. 흥이 나면 곧잘 노래도 하는 그는 몇 해 전 ‘일의대수(一衣帶水)’란 제목으로 음반을 취입했다. 한국과 일본은 그 어떤 나라보다 가까운 이웃이다. 이웃이 한순간에 무너질 때 돕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더구나 자연의 재앙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함께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 과거사를 떠올리는 것은 파편적이다. 간바레 닛폰(힘내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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