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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선의 화두는 경제민주화였다. 그해 새누리당은 총선에서 과반을 얻은 여세를 몰아 12월 대선에서도 승리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설계 같은 진보의 강령을 과감하게 수용했기에 집권이 가능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서방의 신자유주의적 사조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급격히 퇴조하면서 포용적 성장이 대안으로 부각된 시대적 상황을 새누리당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제민주화는 재벌에 기댄 낙수효과가 한국경제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반성의 표출이기도 했다.

“창조경제가 꽃을 피우려면 경제민주화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공정한 시장질서가 확립되어야만 국민 모두가 희망을 갖고 땀 흘려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소기업 육성정책을 펼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가 추구하는 경제의 중요한 목표입니다. 소상공인과 중소기업들을 좌절하게 하는 각종 불공정행위를 근절하고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고쳐서 어느 분야에서 어떤 일에 종사하든 간에 모두가 최대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것입니다. 그런 경제 주체들이 하나가 되고 다 함께 힘을 모을 때 국민이 행복해지고, 국가 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2013년 2월 박근혜 전 대통령 취임사 중)

창조경제만 혁신성장으로 바꾼다면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알려져 있다시피 박근혜 정부는 집권 후 경제민주화를 사실상 방치하면서 한국경제의 누적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 실패했다. 2017년 대선에서도 경제민주화는 주요 어젠다였다. 예컨대 대선 후보들 모두 달성 시기는 달랐지만 최저임금 1만원 달성을 공약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인 적이 있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와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을 축으로 하는 문재인 정부 2기 경제팀이 짜여진 뒤 소득주도성장의 폐기를 주장하는 보수야당의 공세가 거세다. 특히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등 범새누리당 계열에서 쏟아지는 비난은 매우 원색적이다. 소득주도성장 기조를 이어가겠다는 김 실장의 발언에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대국민 선전포고”라고 규정했다. 경제민주화에 올인했던 몇 년 전 새누리당의 흔적을 현재 자유한국당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사회경제적 약자를 보호하고 힘을 키워주는 게 경제민주화의 본질이다. 사회경제적 약자의 소득증대, 소비증대, 내수활성화로 이어지는 경로가 소득주도성장의 핵심이다. 최저임금 인상, 의료비 등 필수생계비 경감, 사회안전망 확충, 인적자본 투자 등 다양한 정책들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소득주도성장은 경제민주화를 구현하기 위한 실천적 방안일 수 있다는 얘기다.

자유한국당을 필두로 한 보수야당이 소득주도성장 폐기를 주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은 불편하다. 소득주도성장을 폐기하라 한다면 갈수록 심해지는 계층별, 대·중소기업 간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은 무엇인지, 무분별한 규제완화와 신자유주의적 기조를 부활시켜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로 되돌아가자는 것인지 궁금하다.

한국에서 경제민주화가 달성됐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소득주도성장 폐기 주장의 주요 이유인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몰고온 부작용을 완전히 부인키는 어렵다. 취약계층 일자리를 줄이고, 소득 하위계층의 소득을 감소시켜 일시적으로 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실제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 해도 보수야당이 경제민주화의 대의를 조금이라도 간직하고 있다면 무작정 소득주도성장 폐기만 주장할 게 아니라 연착륙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게 옳다.

대통령 5년 단임체제에서 방향이 꽤 괜찮았던 정책들이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폐기되고, 뒤집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전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보수야당은 이제 소득주도성장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봐야 한다. 가는 길이 구불구불하고, 때로는 뒤로 갈지언정 사회경제적 약자를 키워주려는 노력이 현 정부나 여당만의 몫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득주도성장이 과거 정부와 현 정부를 구분짓는 중요 지점이긴 하나 소득재분배와 양극화 해소는 어떤 성향의 정부가 집권하든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과제이다.

앞으로도 소득주도성장의 방법론을 둘러싼 논쟁은 필요하나 듣보잡 좌파이론으로 낙인찍으며 반사이익만 누리려는 행태는 국민들의 지지와 공감을 얻기 어렵다.

<오관철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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