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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점 차로 지고 있는 8회말 무사 1·2루. 감독은 타석에 들어선 6번 타자에게 강공 사인을 보냈다. 7번 타자가 미덥지 못해서다. 결국 유격수 땅볼로 더블 플레이가 나오면서 천금 같은 기회를 날리고 게임도 잃었다. 해설자는 보내기 작전을 왜 안 했냐고 열을 올리지만 무슨 소용이 있나.

야구도 그렇지만 역사에서도 지나간 상황에 대한 가정은 사실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굳이 따져보는 것은 그 과정에서 교훈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1년 전 국정농단 사태가 촉발한 촛불집회가 없었다면 지금쯤 한국은 19대 대통령 선거(12월20일)를 앞두고 뜨겁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정치권의 합종연횡이 정리가 되면서 아마도 여권의 반기문 후보와 야권의 문재인·안철수 후보가 치열하게 선두다툼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국가정보원 사이버 외곽팀과 국군 사이버사령부 심리전단이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열심히 올려대는 댓글은 대선을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깨어 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은 1년 전에 이 나라 역사의 물꼬를 돌렸다. 이후 우리는 어떻게 바뀌었고, 얼마나 나아졌을까.

촛불집회의 결과물들은 곳곳에서 눈에 띈다. 대통령이 바뀌었고, 여야가 교체됐다. 과거 권력의 핵심에 있던 많은 이들은 구치소 신세를 지고 있다. 최저임금이 크게 올랐고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도 그 어느 때보다 기대가 커지고 있다. 검찰도 경찰도 서로 인권지킴이가 되겠다며 경쟁하고 있다. 해고자였던 최승호 PD가 MBC 사장이 된 것은 새옹지마, 상전벽해라는 말이 제격이다.

이런 모습이 달갑지 않아 비난하고 비아냥거리고 저주하는 이들도 있고, 이 정도 변화로는 택도 없다며 더 많은 채찍질을 요구하는 이들도 있다. 어찌됐건 중요한 것은 대통령과 정부만 바뀐다고 우리가 촛불집회에서 바랐던 세상이 올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라를 구성하는 주체들인 국민들, 정치인들, 기업들, 사회단체들이 모두 바뀌어야 한다. 물론 이를 선도하는 것은 정부다.

얼마 전 만난 서울시내 한 사립대의 총장에게서 지난달 포항 지진 당시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연기됐던 긴박한 상황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다. 수능 하루 전날 포항에서 강진이 발생하자 정부는 전격적으로 수능 1주일 연기를 결정했다. 많은 대학들이 수능 직후 주말에 논술시험을 잡아 놓고 있었기에 고심이 컸다. 대학 입장에서 논술시험 연기는 매우 힘들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초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호텔에 들어가 있던 논술문제 출제 교수들과 검증 교사들은 시험이 재개될 때까지 호텔에 더 갇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논술시험일 이후 호텔방이 이미 모두 예약이 돼 있어 이들은 더 머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해산하면 기존에 마련했던 문제는 모두 폐기해야 한다. 그리고 원점에서 출제 교수와 검증 교사들을 다시 구성해 문제를 새로 내야 하는 것이다. 200여명이나 되는 시험 감독관들의 일정을 다시 짜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다른 대학들의 동향을 알아보니 그대로 진행하겠다는 곳도 있고, 연기하겠다는 곳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 교육부에서 논술시험 연기 요청이 들어왔다. 강제성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 연기 결정을 했다. 전국의 모든 주요 대학이 논술시험 연기에 동참했고, 일정이 흐트러진 수험생과 학부모들 중 항의하는 이들은 없었다. 이 대학 총장은 당시 상황을 보면서 1997년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이 연상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서로 싸울 땐 상대에게 지독하지만 위기에서는 뜻과 힘을 모으는 우리 국민들의 저력이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바로 깨어 있는 시민들의 힘이다.

이번 사태는 정부의 신속하고 단호한 조치와 불편과 불이익을 감수한 국민들의 협조가 빛을 발하며 최선의 결과를 냈다. 이는 정부 결정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부가 앞으로 또 일어날지 모를 예기치 못한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신뢰가 먼저라는 얘기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도 6개월이 넘었다. ‘허니문’ 기간이 끝나가고 있는 셈이다. 연애 때는 눈도 멀고, 귀도 멀지만 결혼은 현실이다. 결혼생활이 지옥과 천당 중 어디로 향할지는 당사자들이 얼마나 신뢰하고 힘을 합쳐 어려움을 극복하느냐에 달렸다. 사랑에 빠지긴 쉽지만 믿지 못하면 그때부턴 지옥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김준기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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