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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취업준비생이던 그대의 글을 읽었습니다. 인터넷 시민언론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휴가 시즌이 서글픈 취준생의 여름나기’였지요. 20대 여성 취준생인 듯한 그대는 글에서 청년들을 취업절벽으로 내몬 ‘헬조선’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자소서를 수백번 썼다” “광탈을 밥 먹듯이 했다”는 ‘넋두리성 푸념’도 늘어놓지 않았지요. 작가 김훈이 쓴 에세이 <라면을 끓이며>의 “모르는 사람과 마주앉아 김밥으로 점심을 먹는 일은 쓸쓸하다”는 대목을 인용하며 시작한 글은 취준생인 그대가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를 실감케 했습니다. 편의점에서 3000원 넘는 메뉴를 선뜻 고르지 못하는 취준생들은 ‘쓸쓸한 맛’에 길들여져 있다고 했지요. 맥주 한 캔을 마시며 다운로드받은 영화를 본 뒤 잠드는 게 취준생들이 만끽하는 일상의 행복이라고 일러주기도 했습니다.

 

 

그대는 한껏 기울어진 세상의 불평등은 ‘빽다방 커피’와 ‘스타벅스 커피’의 차이를 넘어선다고 했습니다. “부모의 재력이 다르고, 졸업한 학교가 다르며, 체득한 문화적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소수에게 집중되는 부와 권력, 기회는 상대적 박탈감을 심화시킨다.” 그대의 지적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현실이 그러하니까요. 한국 사회의 불평등은 계층이동의 사다리를 사라지게 했습니다. 지난달 통계청이 내놓은 ‘2017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시민의 65%가 노력을 통해 사회·경제적 지위를 끌어올릴 수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이쯤 되면 ‘수저계급론’이 고착됐다고 봐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가 공정하게 분배되는 정의”(마이클 샌덜, <정의란 무엇인가>)가 실현되길 기대하는 것은 허망한 일입니다. “상위 1%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하는 게임의 규칙”(조지프 스티글리츠, <불평등의 대가>)도 작동하지 않습니다. 특권과 편법, 금수저들의 탐욕이 득세하는 한국은 반칙의 나라입니다.

취준생들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한 공공기관 채용비리는 반칙의 나라가 보여준 ‘추한 민낯’이었지요. 채용비리를 저지르다 감사원 감사에서 적발된 공공기관은 석탄공사·디자인진흥원·석유공사·서부발전 등 20여곳에 달합니다. 특히 강원랜드의 채용비리는 범죄나 다름없습니다. 2012~2013년 지원자의 95%가 ‘빽’으로 입사했다는 사실은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금융감독원 채용비리는 또 어떠했습니까. 청탁받은 지원자를 합격시키려 채용 정원을 늘리는가 하면 필기시험 4등은 떨어뜨리고, 11등은 합격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지요. 우리은행도 지난해 신입행원 공채에서 금감원·국정원 등의 유력 인사와 VIP 고객에게 채용 청탁을 받아 16명을 합격시킨 사실이 드러났지요. 든든한 ‘뒷배’가 없는 취준생들은 금수저들의 들러리만 선 셈입니다. 공공기관과 시중은행에서 ‘뒷문 채용’ ‘봐주기 채용’이 횡행했다니 분통 터질 일입니다. 불합격 통보를 받고 자신의 능력 부족을 한탄하며 낙담에 빠졌을 취준생들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채용비리가 터진 뒤 그대가 쓴 글을 다시 읽었습니다. “지금 사회가 주는 독(毒)이 있다. 필기에서, 면접에서 불합격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멍이 든다. 겉으로는 태연해도, 속은 곪아 터지기 직전이다. 취준생들은 가슴에 시한폭탄을 품고 매일 아침 독서실로 향한다. 멀쩡한 사람도 괴물이 되기 쉬운 환경이다.” 그럼에도 그대는 다짐했습니다. “괴물 같은 세상에서 살지만 무얼하든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걸 확인하며 살자”고 했지요. 취준생에게 절망만을 안기는 괴물 같은 세상에서도 그대는 희망의 근거를 찾으려 했던 것이지요.

그대의 글을 읽은 지 두 계절이 지났습니다. 올해 취업 시즌도 거의 끝나갑니다. 그대가 ‘취준생 꼬리표’를 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부디 취업에 성공해 사회인으로서의 첫발을 뗐으면 합니다. 혁명가 체 게바라는 “무릇 모든 아버지들은 자녀가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려면 반칙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특권과 편법이 난무하는 반칙의 나라에 사는 청년들은 꿈을 꾸지 않습니다. 불공평한 생존보다는 공평한 파멸을 원할 뿐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라는 말을 모든 취준생이 공감하는 날이 올까요? 반칙의 나라 취준생들은 가수 박기영의 <취.준.생> 노랫말처럼 당당하게 외쳐야 합니다. “준비가 다 됐는데 어디를 가도 모자란다고 하네요. 하지만 그건 나의 잘못이 아닙니다.” 한마디 거들자면 “대한민국은 청년을 위한 나라가 아닙니다. 아직까지는….”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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