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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입만 열면 ‘새 시대’를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과연 새 시대인가? 그렇다. 1987년 6월 우리 국민의 위대한 민주역량이 눈을 떴을 때, 구시대는 죽었다. (중략) 새 시대에 올바로 대처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구시대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반성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제대로 되고 있는가?”

<전태일평전>의 저자이자 한국의 대표적 인권변호사였던 고 조영래 변호사가 1988년 4월 한 신문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그 전해 그의 표현대로 우리 국민들의 위대한 민주역량은 군사독재로 대변되는 야만의 시대에 역사적인 승리를 거뒀지만 정치·사법·경제 분야 등 사회 곳곳엔 과거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지적한 글이다. 그저 대통령만 바뀌었을 뿐이다.

2016년 촛불혁명이 승리했다. 그리고 2017년 정유년 새해가 밝았다. 조영래식으로 말한다면 새 시대를 열어야 할 과제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스멀스멀 걱정도 피어난다. 대통령 노태우 당선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로 이어진 1987년 6월항쟁,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로 막을 내린 4·19혁명 등 안타까운 역사의 후퇴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위기감이 다가오고 있다.

“독하게 굴어… 그래야 니가 산다.” 그래서 모름지기 혁명은 독해야 한다고들 얘기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산물 중 하나인 프랑스 국가(國歌) ‘라 마르세예즈’(마르세유 사람들)는 그 혁명이 얼마나 독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이 너희의 아들과 아내의 목을 베러 진군해 오고 있다” “진군하자! (그들의) 더러운 피로 우리 땅의 밭고랑을 적시기 위해” 등등 이 노래의 가사는 프랑스처럼 우아한(?) 선진국의 국가가 맞는지 의아할 만큼 적나라하고 끔찍한 표현과 구호로 가득 차 있다.

이 노래는 1792년 프랑스 혁명을 와해시키려는 주변 국가들의 침략에 맞서 출정한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출신 시민군들이 즐겨 부르면서 혁명의 상징이 됐다. 이 노래를 부르며 진군한 프랑스 시민군은 유럽 최강의 육군으로 불린 프로이센군을 격파했다. 당시 그 전투(발미 전투)에 참전했던 독일의 문호 괴테는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세계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가 그 막을 올렸다”고 일갈했다.

이렇게 독했던 프랑스 혁명도 이후 각종 반동과 반혁명의 시대로 이어졌다. 로베스피에르 등 혁명세력은 쿠데타로 무너졌고,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는가 하면 무너진 왕정이 복귀하기도 했다. 그래서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프랑스 혁명의 가장 지속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결과는 (민주주의도, 자유와 평등도 아닌) 미터법”이라고 평가했는지 모르겠다. 실제 1793년 프랑스 혁명정부는 헌법에 보통선거제를 규정했지만, 여성까지 포함된 보통선거권이 확립된 것은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1944년이다.

어찌됐건 2016년 우리는 한발 앞으로 전진했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역사가 후퇴할 거란 걱정이 많았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는 21세기 한국을 군사독재 시대를 훨씬 건너뛰어 봉건시대로까지 되돌린 형국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시민들의 힘으로 우리가 후퇴하지 않고 한발이라도 앞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가장 빠른 속도로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라고 내세운다. 선진국들이 수백년 동안 쌓아온 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성장을 한국은 1945년 해방과 1950년 한국전쟁의 참화 이후 50여년 만에 성취했다는 것이다. 흔히 얘기되는 ‘압축성장’이다. 하지만 역사 발전에 압축은 없어 보인다. 겉보기에는 그럴듯한 헌법과 정치체제, 세계 십몇위권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를 갖췄지만 실상은 불합리하고 불완전한 정치·경제·사회구조 위에 만들어진 사상누각이다. 박근혜·최순실 주연 막장 드라마에 그 취약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만큼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드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올해도 그렇게 한발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역사에서 보듯 또다시 좌절과 실패, 후퇴가 거듭될 것이다. 그러나 5·16이라는 좌절과 1987년의 대선 패배는 최소한 교훈이라도 돼서 촛불혁명의 밑거름이 됐을 거다.

그래서 2016년의 소중한 승리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떨어지는 빗방울조차 두려워하며 가야 한다.

과연 역사는 이번에도 승리하지 못하고 그저 교훈만 줄 것인가.

김준기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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