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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주권자의 힘으로 불타오른 촛불이 격동의 병신년을 몰아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힌 것만 같습니다. 전국 대학교수들은 2016년 한 해를 ‘군주민수(君舟民水)’라는 사자성어로 집약한 바 있습니다.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국정농단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과 이를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하려던 정치권에 대한 민심의 분노를 표현한 사자성어라고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광장의 촛불을 이끈 주역들은 새로운 세대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2차 베이비부머로 1980년대 시민혁명에 참여하거나 적어도 목도한 이들의 자녀들입니다. 남아선호사상이 마지막으로 발버둥 치던 가부장 가족체제의 끝자락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일인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신자유주의 시대, 그리고 도구적 가족주의의 역설로 인해 자연스레 개인주의와 평등 감수성을 체화하며 자란 이들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타인과 접속할 수 있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대한민국이 한번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다양성, 인정, 자유, 평등, 인권, 민주주의, 평화 등 근대적 가치들을 수평적 의사소통구조, 내적 동기에 기인한 자율적 참여, 개방성과 유연성을 바탕으로 한 네트워크 등 탈근대적 방식을 통해 구현하고자 합니다. 그들에게 디지털 세상은 집단지성 구축의 장이요, 유기적 연대의 실험장이며, 저항의 광장 그 자체였습니다. 이들은 이제 정의와 민주주의에 관한 대안적 프레이밍(틀짜기)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촉구 '6차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해 12월 3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박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어쩌면 이들이 주도하는 혁명의 극적인 불꽃은 2014년 세월호 사건에서 점화됐는지 모릅니다. 가라앉는 배에서 들려오는 생존을 향한 절규가 현실의 곤고함 속에 있는 나의 비명과 교차하고, 낯선 타자의 영정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목도한 이들. 한국사회의 온갖 구조적 모순의 징후적 사건이었음에도 진상규명은커녕 온전히 판단하고 분노하고 애도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사건. 그래서 더욱 꾹꾹 눌러왔던 분노와 슬픔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연결돼 마침내 2016년 총선의 에너지를 만들고 촛불의 가을 바다를 이루어 냈는지도 모릅니다. 광장에 홀로 또는 누군가와 함께 섰던 저의 학생들은 한결같이 세월호를, 국정교과서를, 12·28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를, 강남역 살인사건을, 구의역 사고를, 고 백남기 농민을, 거제도 조선소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숨 막히는 나의 삶을, 이유 없이 죽어가는 동료를, 정직하지만 가난한 부모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보수정권에서 무수히 목도된 무고한 죽음들, 심문되지 못한 죽음에 대한 책임, 이에 대한 상실감과 애도의 욕망은 소진되지 않은 채 그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었고, 스스로를 ‘세월호 세대’라 부르며 광장에 섰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분노하는 대상은 의식의 식민화를 벗어나지 못한 채 봉건적 가치를 체현하고 구현하고자 하는 모든 기득권 세력은 물론이요, 근대적 가치로 저항의 기치를 내걸었으나 여전히 권위주의적, 교조주의적인 집단을 망라합니다. 특정한 부정의 이외의 다른 차별에 무감한 진영논리에 갇혀 있는 이들, 단일 정체성·단일대오를 강조하며 낡은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이들, 파괴적 발전 논리에 여전히 목숨 거는 이들도 포괄합니다. 보수와 진보라는 외피에 가려있던, 학연, 지연, 혈연, 성별로 촘촘히 짜여있는 지배계층의 동질성이 비선 실세와 정경유착을 가능케 했고, 정치검찰과 굴종적 언론을 가능케 했던 힘의 실체라는 것을 이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의 저항은 그러한 구조에서 파생되고 정당화됐던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 비하, 무시, 배제, 차별, 폭력, 이를 통한 특정 집단의 과잉대표성 유지와 기득권 재생산, 분배불평등, 약탈적 경제구조 전반에 대한 것입니다.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들과 절연하고자 하는 이들의 숭고한 외침, 그리고 반식민, 반봉건, 반민생, 반남성중심주의, 반차별, 반혐오, 반폭력을 향한 희망의 행진을 이어나가도록 할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가르치거나 지도하려 하지 마시고, 빈곤한 민주주의 내용을 채우고 일상화하고자 하는 요구에 귀 기울여 스스로 성찰하시기 바랍니다. 사소한 차이가 거대한 부정의를 만드는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이들의 감수성을 배우고 체현하려 노력하십시오. 일상의 불편함 및 불안과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들이 공기처럼 누렸던 특권들을 조각 내 해체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회변혁 작업에 기꺼이 동참해 주십시오.

그래야만 정유년 새해, 민주주의는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의 일상 속에 다가와 있을 것입니다.

이나영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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