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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마지막 날에도 광화문광장은 시민들로 가득 찼다. 그들이 왜 그곳에 모였는지 우리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12월31일 광장에 가지 않은 이들도 이유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간 그곳에 있지 않으면 독감처럼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파고드는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어서라는 걸. 광장에서 외치고 토론하고 노래하지 않으면 악귀가 달라붙은 것 같았던 끔찍한 한 해를 차마 떨치지 못한 채 새해를 맞을 수 있다는 불길함이 엄습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2016년은 국가가 산적한 난제들과 씨름하며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간 시간이 아니라 멈춘 시간이었다. 아니, 지난 4년 전체가 동결된 시간이었고 2016년은 그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4년 동안 우리는 공익을 위한 제도, 권한, 법적 절차, 그리고 공공에 헌신한 대가로 공직자에게 주어지는 빛나는 명예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하릴없이 지켜봐야 했다. 국가의 단단한 껍질이 깨지면서 드러나는 썩어 문드러진 속살들, 그 속에 득시글거리는 해충과 기생충들, 그것들이 풍기는 악취를 꼼짝없이 지켜보고 냄새 맡아야 했던 우리 시민은 포르노 극장의 관객이었다. 국가라는 이름의 아우라에서 느껴지는 권위와 도덕이 땅에 떨어지면서 국가의 우산 아래 모여들었던 ‘국민’은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세상 앞에 강제로 발가벗겨진 것 같은 느낌, 즉 견딜 수 없는 수치와 모멸감을 안겨줬다.

새해가 밝았지만, 세상은 아직 어둡습니다. 지난해 세밑까지 촛불을 들었을 때 시민들은 비로소 자신의 그림자라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촛불은 ‘여기 사람 있다’고 외치는 목소리였습니다. 암흑에 빠져 있던 민초들을 꺼내야 한다는 구조 신호였습니다. 새 세상에 대한 염원이었습니다. 새해에는 굳이 촛불을 켜지 않아도 대지와 광장의 목소리들이 곳곳에 퍼져나갔으면 합니다. 사진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2016년을 보내고 2017년을 맞은 새해 첫날 새벽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마르크스는 역사가 두 번 반복된다고 했다.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희극으로. 프랑스혁명의 공화국 정신을 무너뜨린 나폴레옹의 제정이 비극이라면 오직 삼촌의 명성 덕으로 권력을 차지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은 희극으로 본 것이다. 4월혁명으로 탄생한 민주정부를 붕괴시키고 영구집권을 꿈꾼 박정희의 시대가 비극이었다면 아버지 덕에 집권한 박근혜 4년의 역사적 반동 역시 희극이다. 그러나 희극의 엑스트라가 되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박 대통령이 우리를 호명했던 ‘국민’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했다. 광장으로, 광장으로 주말마다 몰려갔다. 그것만이 박 대통령이 지배했던 국가에서 벗어나는 길이었고, 뼛속 깊숙이 침윤했던 치욕을 털어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우리는 비로소 그곳에서 ‘자유로운 시민’이 되었다.

광장에는 동료 시민들 간 우애와 연대, 배려와 협동이 있었다. 가족, 친지, 동료와 혹은 홀로 나와서도 낯선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의견을 나누고 공감하고 춤췄다. 그곳에서는 여성, 청소년, 소수자들이 존중받았다. 중·고등학생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발언했다. 시민의 발견이었다. 광장은 정치적 각성의 장이었고 주말학교였으며 박근혜의 국가가 준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이었으며 따뜻한 공동체였다. 그런 의미에서 2016년은 최악의 시절이자 최고의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어리석음의 시대이자 지혜의 시대였다. 불신의 세기이자 믿음의 세기였다. 절망의 겨울이었지만 희망의 봄이기도 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았지만 결국 이렇게 한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광장을 떠나면 우리는 다시 고립된 개인으로 돌아간다. 광장의 우의와 연대는 광장 밖의 경쟁과 이기심으로, 배려와 협동은 차별과 배제로 대체된다. 광장 밖은 정글이며 정글에서는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광장을 떠난 시민은 더 이상 시민이 아닌, 원자화된 개인으로 살아간다. 이는 한국인의 오래된 트라우마를 떠올린다. 4월혁명, 6월 민주항쟁, 2008년 촛불집회는 기성 체제의 복귀로 끝났다. 기득권 세력은 시민이 광장에 있는 동안은 숨죽이고 있지만 광장을 떠나는 순간 바로 고개를 든다. 시민이 광장을 떠나는 날은 바로 그들의 세상이 다시 열리는 날이다.

다시 한국 사회가 광장과 광장 밖으로 양분된다면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시민 떠난 텅 빈 광장이 우리의 일상이라면 그 빈자리는 선출되지 않은 재벌, 검찰, 국정원, 관료, 족벌언론, 기득권의 차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민의 이름을 도용해서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거나 함부로 국익이라고 정의한 사익을 위해 자신들의 금력과 권력을 동원할 것이다. 우리는 시민의 부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악행이 저질러질 수 있는지 박근혜 정권을 통해 똑똑히 목격했다. 우리가 계속 투표하는 노예로, 유권자이기는 하지만 시민은 아닌 존재로 남아 있다면,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는 시인 김수영의 56년 전 한탄을 되풀이할 수 있다. 사실 지난 4년도 고립된 개인이 아무런 매개 없이 국가와 맞닥뜨린 결과였다. 개인과 국가 사이의 넓은 공간을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기들의 놀이터로 바꾸어 놓은 결과였다. 그런 사태를 다시 겪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어디서라도 시민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가정, 직장, 학교, 동네에서도 시민적 권리를 보유한 당당한 주인으로서 발언하고 협동하며 용기와 우애를 보여야 한다. 우리는 동창회, 향우회 활동은 열심히 해도 노동조합원으로, 시민단체 회원으로, 자원봉사자로, 정당의 당원으로 참여하는 일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노동자가 참여하는 노동조합, 시민 참여가 활성화된 시민단체, 당원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정당 활동은 이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기득권을 위축시킨다. 

잊지 말자. 불의한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광장에서 서로 연결된 시민의 힘이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이것이 꼭 물리적 광장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민적 공동체가 있다는 자각만 있다면, 그런 인식이 삶의 모든 측면에 스며든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지킬 수 있다. 박근혜 정권이 탄생하고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이 4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의 하나도 시민으로서의 주권적 자각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유독 박 대통령의 무능과 실수, 실패에 관대했다. 선의를 어느 정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옥으로 가는 길이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걸 알아야 했다. 시민의 참여와 감시 견제가 없는 어떤 권력도, 어떤 선의도 박근혜 정권처럼 될 수 있다. 정권 교체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박근혜라는 인물이 대통령이 아닐 때도 한국 사회가 특별히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떠난다고 자동적으로 검찰과 방송이 바로 서고, 재벌 독점 경제가 사라지고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정권 교체는 여러 번 있었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았고, 어떤 경우는 더 나빠지기도 했다. 

생쥐나라가 있다. 검은 고양이로 구성된 정부를 선출했다. 고양이는 좋은 법을 통과시켰다. 물론 고양이에게 좋은 법이다. 쥐구멍이 고양이의 발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커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쥐의 삶은 힘들어졌다. 마침내 더 참을 수 없었던 생쥐들은 검은 고양이를 퇴출시키고 흰 고양이를 뽑았다. 흰 고양이는 네모난 쥐구멍을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네모난 쥐구멍은 둥근 쥐구멍의 두 배로 커졌고 생쥐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그러자 참을 수 없었던 생쥐들은 다시 검은 고양이를 선출했다가 퇴진시키고 또다시 흰 고양이를 뽑았고, 심지어는 반은 희고 반은 검은 고양이를 뽑기도 했다(토미 더글러스의 1962년 캐나다 의회 연설).

이 우화는 국가가 시민을 대표하지 않는 한, 국가를 구성하는 제도들이 시민의 통제와 감시하에 있지 않는 한 정권 교체는 지배 엘리트의 교체로 끝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은 정권 교체를 넘어서는 일이다. 사실 새로운 세상이 뜻밖의 선물처럼 오는 법은 없다. 낡은 것들은 발이 없어서 스스로 물러설 줄 모르지만 손은 있어서 해가 바뀌어도 우리 발목을 잡고 버틸 줄 안다. 아마 새해는 낡은 것들과 대결하는 해가 될 것이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은 우리가 살고 싶어하는 나라가 아니다. 이게 중요하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바꾸는 것이다. 시민적 결의만 있다면 못할 게 없고 두려울 것도 없다. 광화문에서 보여준, 황소처럼 센 시민의 힘을 기억하자.     

그래도 만에 하나 흔들린다면 광화문의 밤을 밝힌 12월31일 촛불의 바다를 떠올리자. 그리고 각자의 가슴에 촛불을 켜두자. 그러면 우리는 후퇴 없는 행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시위를 떠난 화살이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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