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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충청권 의원들이 퇴임을 앞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찾아가 면담했다. 유력한 대권주자와 국회의원들이 견해를 나누고 미래를 도모하는 것이야 무방한 일이다. 한데 의원들이 지역주의에 기대서 ‘묻지마 지지’를 선언하는 행태는 실망을 넘어 섬뜩하다. 비전과 지향보다는 이해 득실만 따져 지역주의를 부채질해온 정치세력 때문에 한국이 입은 상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새누리당 소속 충북 의원들이 지난 22일 미국 뉴욕에서 “반 총장이 정하시는 길로, 공산당(입당)만 아니라면 따라갈 것”이라고 하자 반 총장은 “고맙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의원들은 “보수와 중도를 함께 아울러서 가야 한다”고 말했고, 반 총장은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답했다. 의원들 발언 취지는 퇴행적이고 조악하다. 반공(反共)을 제1 가치로 내세우기만 하면 지역주의를 조장해도 정당화된다는 것인가. 진보적 시민을 배제하고 나머지만 아우르면 대권을 잡을 수 있다는 속셈도 무섭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AFP연합뉴스

이들이 충북 음성 출신 반 총장에게 구애하면서 내세우는 게 ‘충청권 대망론’이다. 그간 반 총장을 노골적으로 지지해온 정우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충북, 정진석 전 원내대표는 충남이 지역구다. 이들은 반 총장을 앞세우면 새누리당 기반인 영남과 충청 유권자에다 ‘기존 정치권 혐오’ 시민을 묶을 수 있다는 그림을 그려왔다. “우리가 남이가(이냐)” 식 지역주의를 부채질하겠다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시민의 바람을 좇는 게 아니라 이익에 맞는 주자를 내세운 뒤 지역을 볼모로 유권자를 줄 세우겠다는 것이다.

반 총장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유엔에서 각국의 이해를 조정하고 국제 규범을 추구해왔다는 이가 기껏 지역주의에 기대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인들이 새로운 형태의 포용적 리더십을 찾고 있다”는 그 자신의 말과도 배치된다. 그렇지 않아도 반 총장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거액의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이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던 차다. 반 총장은 대리인들을 시켜 부인했으나, 경향신문에 따르면 박 전 회장과 잘 아는 법조계 인사는 거듭 금품수수 사실이 맞다고 확인했다.

반 총장이 새로운 리더십을 구축하려면,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검찰 수사를 자청해야 한다. 또 내세울 거라곤 지역주의밖에 없는 ‘정치 좀비’보다는 적폐를 해소하고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이들과 만나 비전과 정책을 궁구하는 데 힘을 쓰는 게 맞다. 안 그러면 일반 시민은 물론 충청 지역민으로부터도 “개갈도 안 난다(‘변변치 못하다’는 충청 방언)”는 지청구를 듣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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