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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번 생각해도 자유한국당이 잘한 것은 없었다. 태극기 세력에 휘둘린 전당대회 직후 ‘망하는 게 답이다’라는 비판을 받은 게 어제 그제의 일이다. 황교안 대표는 문재인 정부를 ‘좌파독재’라고 비난하는 데에만 열을 냈을 뿐 쇄신 청사진을 보여주지 못했다. ‘5·18 망언’ 3인방에 대한 징계는 차일피일 미뤘다.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이 분열”(나경원 원내대표) “(노회찬 의원은) 돈 받고 스스로 목숨 끊은 분”(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 막말이 이어졌다. 탄핵 이후 한 발짝도 못 나아간 한국당 민낯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한국당은 어떻게 ‘진보 1번지’라는 창원성산에서 선전했는가.  

답은 나와 있다. 여권이 못했다.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한반도 평화국면 교착, 경기침체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오만했다. 국정을 책임진 세력으로, 어려운 현 상황에 대해 국민들에게 송구해하지 않았다. ‘우월한 우리가 적폐를 청소해야 한다’는 목소리만 크게 들렸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의 ‘20년 집권론’, 김경수 경남지사의 법정구속 후 집권여당의 전례 없는 사법부 압박…. “문재인 정부 DNA(유전자)에는 민간인 사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 발언에선 뿌리 깊은 선민의식이 드러났다.

차곡차곡 쌓인 오만의 기운은 ‘인사참사’라는 말을 낳은 이번 개각에서 터졌다. 투기지역에 아파트 3채를 소유한 장관 후보자, 아들의 호화 유학비 충당을 위해 전세 보증금을 올렸다는 장관 후보자…. 흠결 없는 공직자가 드물었던 ‘이명박 때’가 떠올랐을 정도다. 그러나 청와대는 잘못을 인정하는 데에 인색했다. 조동호 전 후보자를 낙마시키면서도 검증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후보자 거짓말 탓으로 돌렸다. 옹색한 변명이다. 만약 다른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 거짓말만 돌출됐다면, 청와대는 조 전 후보자를 잘라냈을까.

청와대는 후보자들의 결격사유를 알고도 이들을 내정하고 국회 청문회 무대에 올렸다고 했다. ‘우리가 이래도 국민들이 이해할 것’이라는 오만이 작동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와중에 대통령의 입이라는 청와대 대변인 투기 논란까지 터졌다. 이러고도 선거를 잘 치를 수 있다고 기대했다면 여권은 안이했던 것이다. 인사 결정권자인 문 대통령은 인사참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여권 관계자들은 최악의 결과는 피했다며 속을 쓸어내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좌불안석이어야 한다. 선거 뒤 몰락 징후가 더 또렷해졌다. 문 대통령과 청와대가 처음 선거에 부담이 됐다는 점을 마음에 담아둬야 한다. 여당 후보들이 청와대 그림자에 숨기만 하면 됐던 지난해 지방선거 때와 반대환경이 된 것이다. 한국당은 총선이 다가올수록 ‘문재인 심판론’을 더욱 쟁점화시킬 것이다. 정치컨설턴트 박성민씨는 경향신문 6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이제는 ‘반문재인’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여론조사도 이런 흐름을 보여준다. 한국갤럽 등 여러 기관의 정례 조사에서 문 대통령 지지율은 대선 때 득표율(41.08%)에 근접했다. 집권 초반 70~80%를 떠받쳤던 중도보수층이 다 이탈했다. 지지율 하락은 단순히 수치 문제가 아니라 국정 장악력과 직결된다. 구조적으로도, 대통령 영향력은 집권 중반으로 접어들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다. 청와대 주도의 국정운영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청와대가 못하면 여당이 나서야 한다. 과연 몸만 무거운 민주당이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회의가 앞선다. 오만한 여권 프레임을 자초한 지도부가 그대로다. 간판이 안 바뀌었는데, 어떻게 변화 시그널을 줄 수 있겠는가. 의원 개개인도 남 탓 할 일이 아니다. 문 대통령과 여권 핵심 인사 방어에만 거품을 물었을 뿐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령 인사참사에 대해서 어느 누가 공개적으로 ‘대통령님, 이게 아닙니다’라고 했나. 청와대와 경우 없이 맞서라는 게 아니다. 너무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하라는 것이다. 여당은 한국당과 맞서 싸우는 데에만 능력을 보였을 뿐 민심을 다독이는 데에는 무능했다. 다 오만해서 벌어진 일이다.

여권에 대한 여론의 호감은 닳아없어지고 있다. ‘내로남불’ 비판에 여러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만한 행태가 지속된다면, 아무리 선의와 진정성을 강조해도 덮일 것이다. 한국당의 비정상적 행태만 두들겨서 넘을 수 있는 위기는 더더욱 아니다. 공인된 불량식품을 두고 ‘먹으면 배탈 난다’고 떠들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이런 추세라면 한국당 퇴행보다 여권의 오만함이 더 큰 흠결로 비춰지는 때가 올 수도 있다. 오만은 그만큼 위험하다. 모든 것을 삼킨다.

<이용욱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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