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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개제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따위는 쓰레기통에 버리겠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그의 재임 중 벌어졌던 상식 밖 사건들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있다. 사유화된 권력기관은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문화예술인·정치인·교수 등 각계각층 인사들의 뒤를 캐고 솎아냈다. 산업화·민주화를 함께 이뤄냈다는 점을 자랑스러워했던 대한민국은 ‘사찰공화국’으로 전락했고, 인권은 10년 이상 후퇴했다.

정치보복이라는 주장 따위도 받아들이지 않겠다. 권력기관이 자국민들에게 저지른 국가적 범죄를 정치적 고려로 덮는다면 또 다른 국정농단이 될 것이다. 지난겨울 광화문광장에 모인 100만 촛불들은 박근혜 국정농단에 대한 단죄만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보수정권 동안 무너졌던 국가를 재정비하자는 열망이 있었다. 정권 차원 범죄를 바로잡는 것은 촛불 민심의 명령임을 저들은 알아야 한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최소한 품위를 지킬 것이라는 기대 따위는 더더욱 하지 않겠다. 이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퇴행적 시도는 국익을 해칠 뿐 아니라 결국 성공하지도 못한다”는 변명만 지난달 28일 페이스북에 올린 데에서도 그의 향후 행태는 예견가능하다. “노무현 정부 내에서는 과연 적폐가 없었나”라는 측근들 주장은 뻔뻔하다. 저들은 정치적 거래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다.

죄 없다고 우겨대는 저들이지만, 실제 그의 핵심 측근은 일찌감치 불행을 예견했다. 청와대 이동관 전 홍보수석의 2013년 12월20일 CBS 라디오 인터뷰 내용이다. “과거에는 퇴임 대통령의 불행한 문화라는 게 따지고 보면 정쟁에 얽혔기 때문에, 퇴임 이후에도 빚어진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런 것을 벗어나서, ‘국제적 활동이나 이런 걸 통해서 국익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자’ 그런 생각을 많이 갖고 계십니다.”

지금으로부터 3년10개월여 전의 이 인터뷰는 무엇을 시사하는가. 당시는 박근혜 청와대와 친박근혜계 기세가 대단했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은 당시 여권 주류가 내세운 대선불복 프레임에 덮였다. 야권은 지리멸렬했다. ‘퇴임 대통령의 불행’을 우려할 시기는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동관은 불행의 그림자를 감지했다. 그는 권부 핵심에서 목도했던 음습한 뒷거래가 언젠가 크게 문제될 것을 알았던 것은 아닐까.

저들의 대응 논리도 이때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불행한 문화라는 게 따지고 보면 정쟁에 얽혔기 때문에”라는 이동관의 말은 한국당의 정치보복 프레임과 다를 바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 출당과 친박 청산으로 박근혜 국정농단의 멍에를 벗겠다더니, 한국당은 이제 또 다른 국정농단의 불구덩이로 뛰어들고 있다. 한국당의 정무감각이 딱하다. 이게 한국당 본질이거나.

‘대한민국 전도사’가 되겠다는 그의 꿈도 산산조각 났음을 알 수 있다. 국정운영의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니, 해외에 알려 국가 위상을 높이고 국익에 기여하는 것이 그의 꿈이라고 이동관은 전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국정농단 정점에 서 있다는 의혹을 받는 그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는 대한민국의 자랑이 아니라, 그 반대로 외부에 비칠 것이다.

최근의 뉴스가 오버랩됐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말 국정원이 한 감독에게 미국 영화 <에어포스원>을 거명하면서 “대통령이 직접 액션도 하는 히어로물을 만들면 영화로도 안보를 할 수 있다”며 제작비 30억원을 제시했다는 내용이다. 물론 그 감독 거절로 이 시도는 좌절됐다. 그런데 우리는 대통령이 등장하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과거 사건들을 목도하고 있다. 대통령은 영웅이 아니라, 범죄집단 우두머리다. 남미나 아프리카 가상의 독재국가를 배경으로 한 3류 액션영화에나 어울릴 법한 줄거리지만, 입만 열면 ‘국격’을 외쳤던 대통령 치하에서 벌어졌던 일들이다.

이런데도, 퇴임 대통령 이명박씨는 “국민의 단합이 필요하다. 국민이 하나로 뭉치면 어느 누구도 감히 대한민국을 넘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국가가 어려우니, 단합이라는 명분하에 자신의 잘못을 덮고 미래로 나가자는 것이다. 권력기관을 동원해 국민을 반으로 쪼개려 했던 이씨에게 누가 단합과 셀프용서를 주장할 권리를 줬는가.

중국 ‘전국책’(戰國策)에 ‘전사불망 후사지사’(前事不忘 後事之師)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난징대학살 기념관 한쪽 벽면에 크게 새겨져 널리 알려진 이 문장의 뜻은 ‘이전의 일을 잊지 않으면, 미래의 귀감이 된다’는 것이다. 과거를 덮고 미래로 가자는 이씨에게 권하고 싶은 글귀다. 우리는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으면서 조금씩 전진해왔다. 퇴임 대통령 이명박씨 경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용욱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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