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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MB)에게 원세훈은 ‘박근혜의 최순실’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박근혜의 뒤에서 드러내기 껄끄러운 일들을 처리했던 최순실이나, 국가정보원이라는 견고한 울타리에 숨어 이명박 보위에만 골몰했던 원세훈의 역할은 큰 틀에서 다르지 않았다.

최순실이 박근혜를 위해, 혹은 대신해 국정 전반에 개입했다면, 원세훈은 국가안위를 최우선으로 살펴야 할 국정원을 이명박 보위기관으로 전락시켰다. 영역이나 행동방식은 달랐지만, 국가의 공적 시스템을 무력화시켰다는 점에서 둘의 행태는 국정농단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원세훈의 행태는 최순실 못지않게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인사개입이나 연설문 수정, 재벌과의 뒷거래 등을 은밀하게 행했던 최순실과 달리 원세훈은 거대한 국가조직 국정원을 사유화해 선거에 개입하고 여론을 조작했다. 언젠가는 들통날 일이었음에도 MB를 위한 마음은 그의 판단력을 흐렸을 것이다. 박근혜 뒤에서 사익을 취했던 최순실보다, MB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은 원세훈의 충성심은 더 맹목적이었다.

원세훈은 2010년 지방선거와 재·보선 등 각종 선거 패배로 국정동력을 잃고 휘청거렸던 MB가 안쓰러웠을 것이다. 당시 흐름대로라면 2012년 대선 결과도 낙관할 수 없고, 패한다면 퇴임 후를 보장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원세훈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국정원을 통해 30개의 민간인 댓글부대를 조직·운영하는 등 여론 조작에 나섰다. 약 3500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관여했고, 세금만 30억원을 퍼부었다. 권력기관이 사유화·형해화되고, 대선결과에 대한 정통성을 훼손하는 일이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는 언론은 ‘공작’을 통해 ‘쥐어패라’고 했다. 재판에서 공개된 녹취록에 따르면 원세훈은 “기사 나는 걸 미리 알고 기사를 못하게 하든지 안 그러면 그런 보도 매체를 없애버리는 공작을 하든지…잘못할 때마다 쥐어패는 게 정보기관 할 일” “국민에 대한 심리전도 꽤 중요하다”고 노골적으로 지시했다. 국정원이 해야 할 대북 공작을 제쳐둔 채 진실을 호도하는 삐라를 국민들에게 마구 뿌려댄 꼴이다.

그렇다면 MB는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구여권에선 ‘이명박의 남자’라는 원세훈의 상징성에 주목한다. 국정원 사정을 잘 아는 구여권 인사는 “원 전 원장 시절 국정원에서 청와대에 보고하지 않은 문건들에 대해서도, 나중에 이 전 대통령 코멘트가 들려왔다. 원 전 원장이 이 전 대통령과 수시로 통화해 따로 보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했다. 한 전직 의원은 “이 전 대통령은 재임 때 원 전 원장과 자주 식사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이 원 전 원장을 부르는 애칭도 있다”고 했다. 원세훈의 독단일 리 없으며, MB가 국정원 행태를 적어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행간이 깔려 있는 증언들이다.

그런데도, MB와 그 주변은 사과는커녕 유감 표명도 없다. 오히려 ‘정치보복식 과거사 들추기’ ‘음모론’이라고 반박한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현 정부가) 보수의 씨를 말리겠다고 한다면’ MB 본인이 직접 입장을 밝힐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이명박 정권을 계승한 자유한국당도 대변인 명의를 빌려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논평했다.

하지만 MB 측 대응은 종국적으로 1%의 공감도 끌어내기 힘들 것이다. 국정원 적폐청산 TF를 통해 속속 불거지는 원세훈 국정원의 비위행위를 정치보복이라는 레토릭으로 덮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MB 측은 ‘정부가 보수의 씨를 말리려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MB 측이 보수세력에 기대고 숨으려 할수록 박근혜 국정농단과 대선참패로 허물어진 보수진영 재건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침묵하는 MB의 속마음과 대응방향이 궁금해진다. 그는 어차피 입을 열 수밖에 없다. 여러 상황들이 MB를 그쪽으로 내몰고 있다. 잘못을 시인하고 고개를 숙일까. 아니면, 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해 “엮였다. 몰랐다”며 음모론을 제기했던 박근혜처럼 발뺌할까. 공모를 인정하자니 감당할 수 없는 죄의 크기 때문에 그의 고민은 깊어갈 것이다. 그는 퇴임 전인 2013년 2월 라디오 연설에서 말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가장 행복한 일꾼’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을까.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명박의 소회와 반응 따위는 아닐 터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녹색평론에 최근 기고한 ‘국가폭력과 트라우마’라는 글에서 “폭력성을 갖고 있는 국가기구를 폭력배들에게 맡겨서는 안된다”고 했다. 나쁜 정권이 들어서면 국정원 같은 권력기구는 언제든 타락할 수 있다는 경고로 들렸다. 이명박과 원세훈의 국정농단을 보면서 이 말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온다.

이용욱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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