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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의 국회 처리를 앞둔 그날 윤영철 당시 헌법재판소장과 출입기자단의 오찬간담회가 예정돼 있었다. 날을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았다. 1년에 한 번 있는 정례 기자간담회인데 몇 달 전에 잡힌 일정이라 어쩔 수 없었다.

오전에 서초동 검찰 기자실에서 TV로 중계되는 국회 상황을 보면서 설마 탄핵안이 통과될까 했다. 앞서 많은 여론조사에서 탄핵 반대가 찬성보다 두 배 이상 많다는 결과가 나온 터다. 야당이 국민들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무리를 하겠는가라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러곤 헌재가 있는 재동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한강 다리를 건너는 순간 라디오에서 탄핵안이 통과됐다는 긴급 뉴스가 흘러나왔다.

기자들의 휴대전화가 일제히 울어댔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어마어마한 사태의 담당이 정치부 기자들에게서 헌재를 출입하는 사회부 기자들에게 넘어오는 순간이었다. 아뿔싸. 탄핵안은 전날에도 통과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이날도 그냥 넘어가려니 하는 생각에 기사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였다. 헌재소장 기자간담회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박근혜정부 출범 4주년인 25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 대규모 촛불 집회를 열고 있다. 17차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촛불과 레드카드를 들고 탄핵을 촉구하고 있다. 김기남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이 무슨 기구한 팔자인지. 헌재 출입기자 때 겪은 대통령 탄핵 사태를 담당 사회부장이 돼 또 맡고 있다. 당시와 지금은 같은 대통령 탄핵 정국이지만 상황은 많이 다르다. 당시는 지금처럼 탄핵심판이 진행되는 심판정에서 대리인단이 재판부를 향해 막말을 쏟아내는 모습은 없었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결과에 승복 못하겠다는 억지는 없었다. 당시도 광화문 일대 등에서는 탄핵 반대 촛불집회가, 헌재 정문 앞에서는 탄핵 찬반 1인 시위가 이어졌지만 지금처럼 ‘빨갱이를 죽이자’느니 ‘군대여 일어나라’느니 같은 비이성적 구호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양태들보다 당시와 지금을 본질적으로 차별 짓는 것은 누가 대통령 탄핵을 이끄는가다. 당시는 국회 의석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등 야당이 탄핵을 주도했다. 반면 이번 탄핵은 야당 등 정치권이 아니라 시민들이 이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초반 야당은 대통령 탄핵 주장을 꺼내는 데 주저했다. 여소야대이긴 하지만 야당은 탄핵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국회 3분의 2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2004년 탄핵을 주도한 정치세력이 몰락했던 ‘흑역사’도 의식했으리라. 그러나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온 시민들의 탄핵 촉구 함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야당은 탄핵안을 발의했고, 여당에서조차 찬성표가 대거 나오면서 국회를 통과했다. 탄핵을 헌재 손에 넘긴 것은 국회가 아니라 시민들이다.

2004년 헌재는 탄핵 기각 결정을 내렸다. 당시 헌재가 발표한 51쪽짜리 결정문에 담긴 기각 사유를 정리하면 이렇다. 노 대통령이 기자회견 등에서 여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고 신임투표를 받겠다고 한 것은 공직선거법이나 헌법을 위배한 것은 맞지만 대통령직에서 파면할 정도까진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헌재는 50일 동안 진행된 7차례의 변론과 여러 증거 자료, 국회 소추위원과 대통령 대리인단이 제출한 각종 서면 등을 면밀히 검토해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그 배경엔 국민 여론도 만만치 않게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탄핵 반대 여론은 지금의 탄핵 찬성 여론만큼 높았다. 탄핵심판이 진행되던 중 치러진 17대 총선 결과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총선 결과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이전보다 103석이나 많은 152석을 얻어 과반을 차지했고, 한나라당은 137석이던 의석이 121석으로 쪼그라들었다. 특히 탄핵안 발의를 주도한 새천년민주당은 61석이 9석으로 줄어들며 완전히 망했다. 압도적인 국민들의 뜻을 목격한 법조계나 정치권에서는 탄핵심판의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고, 실제 결과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이 같은 사정을 잘 아는 박근혜 대통령 측은 지금 여론 돌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서울광장에서 열린 탄핵 반대 집회에 대한민국 인구의 10분의 1인 500만명이 모였다느니, 탄핵 찬반 의견이 5 대 5가 됐다느니 주장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3일 한국갤럽이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는 탄핵 찬성 응답이 77%이고, 반대는 18%였다. 탄핵심판 초기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수치다.

헌재는 이번에도 81일 동안 진행된 17차례의 변론과 여러 증거 자료, 국회 소추위원과 대통령 대리인단이 제출한 각종 서면 등을 면밀히 검토해 결정을 내릴 것이다.

지난 주말은 유난히 햇살이 좋았다. 봄은 성큼 다가왔고, 탄핵심판 선고도 며칠 남지 않았다.

김준기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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