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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년 전쯤 온라인 관련 부서에서 일할 때 사무실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1980년대에 이름이 꽤 알려졌던 사람인데 자신이 관련된 ‘사건 기사’를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사건 이후 20여년이 흘러 자식들이 결혼할 때가 됐는데 그런 기사가 남아있어서 부끄럽다는 것이 이유였다. 해당 기사를 찾아봤더니 전화한 당사자뿐만 아니라 관련된 사람들의 실명이 모두 공개되어 있었다. 이름과 나이는 물론 살고 있는 집의 주소까지 나온 관련자도 있었다. 내부 회의를 거쳐 기사를 삭제하지는 않고, ‘현재 기준’에 맞게 이름과 주소를 모두 보이지 않게 처리했다. 당사자도 만족했는지 그 이후에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수십년 전에는 흔한 기사였다. 사건이 일어나면 관련된 사람의 실명 공개는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 그런 기사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사회 전체의 인권 감수성이 올라가면서 언론도 이를 따라갔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가 일어나고 다음날, 내가 일하는 부서는 ‘사상자 통계 업데이트’ 업무를 맡았다. 소방청 등 관련기관에서 나오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종합해 희생자와 부상자가 얼마나 나왔는지 알려야 했다. 그중에는 희생자들이 지금 어느 병원에 안치되어 있는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느 병원에 몇 명이 있는지까지 정리한 뒤 선배에게 물었다. “희생자 명단이 병원별로 나오면 그것도 써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애타게 가족을 찾고 있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선배가 대답했다. “무슨 20년 전 이야기를 하고 있냐.” 물론 관련기관이 희생자 명단을 공개하지도 않았다.

교육부는 이태원 핼러윈 참사가 일어나고 이틀 뒤인 지난달 31일 ‘학생 피해 현황’을 발표했다. 학생 사망자는 6명, 교사 사망자는 3명, 학생 부상자는 5명이었다. 학생 사망자 중 중학생은 1명, 고등학생은 5명으로 확인됐다. 교육부는 사망한 학생들은 모두 서울시교육청 관할 학교에 재학 중이란 사실까지만 밝혔다.

과거의 관행대로라면 기자들은 사망자가 나온 학교를 찾아가서 같은 반 친구들에게 심경을 물었을지도 모른다. 다친 학생들을 찾아 마이크를 들이댔을 수도 있다. 교육부가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해당 학교의 이름과 위치를 알아내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언론사와 기자의 인권 감수성이 높아진 까닭도 있겠지만, 이제는 그런 기사를 쓰면 시민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경향신문은 2019년 11월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라는 기획 시리즈로 산업재해의 심각성을 알렸다. 고용노동부에 보고된 중대재해 발생 현황 목록과 산업안전보건공단이 작성한 조사의견서를 토대로 2018년부터 2019년 9월까지 떨어짐, 끼임, 깔림·뒤집힘, 부딪힘, 물체에 맞음 등 주요 5대 원인으로 사망한 노동자 1200명을 11월21일자 종이신문 1면에 실었다. 김용균처럼 알려진 고인 외에는 성씨만 적었다. 외국인은 알파벳 첫 자나 한글 발음 첫 글자로 표기했다. 이름을 다 쓰지 않았지만 그들을 추모하고, 산업재해 심각성을 환기시키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지난 14일 시민언론을 표방한 신생 매체 ‘민들레’가 이태원 핼러윈 참사 희생자들의 이름을 공개해 논란이 일었다. 이들의 선의와 정의감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명단 비공개가 “끊임없이 책임을 회피하며 책임을 논하는 자체를 금기시했던 정부 및 집권여당의 태도와 무관치 않다”는 이들의 주장도 존중한다. “지금까지 대형 참사가 발생했을 때 정부 당국과 언론은 사망자들의 기본적 신상이 담긴 명단을 국민들에게 공개해 왔다”는 민들레의 반박도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위에 여러 사례를 든 것처럼 이제 개인의 이름은 언론이 마음대로 공개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그때그때 여론의 흐름과 맥락을 면밀히 살펴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 이름이 필요하면 유족에게 동의를 얻어 취재한 뒤 공개하는 것이 정상적인 절차다. 물론, 유족 취재는 당하는 사람은 물론, 하는 사람도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그래서 요즘은 아예 시도 자체를 안 하는 경우도 많다. 보도로 얻을 수 있는 ‘공익’보다 유족이 감내해야 할 고통이 더 클 수 있다. 자료를 입수해 공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칠 의사가 없다면, 희생자 명단 공개는 하지 않는 것이 맞다. 최소한, 지금 당장은 아니다.

<홍진수 정책사회부장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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