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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성취를 내심 부러워하던 일본 정치가 한국 정치를 우습게 생각하기 시작한 정확한 시점이 있다. 바로 한국 검찰이 2014년 일본 산케이 신문의 가토 당시 한국지국장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한 때다.

세월호 사건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가토의 칼럼, <박근혜 대통령 여객선 침몰 당일, 행방불명… 누구와 만났을까?>가 문제였다. 애당초 일본 극우민족주의를 대변하면서 독도 문제 등에 있어서 가장 반한(反韓)적인 논조를 취해온 산케이 신문이, 현직 대통령의 “애정행각” 운운한 내용은 즉각 독도사랑 등의 시민단체에 의해 고발되었고, 검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를 기소, 이듬해 징역 1년6개월을 구형하였다.

해당 재판에 대한 일본 및 해외 언론들의 뜨거운 관심에 비해, 국내 언론이 특별한 입장을 표명한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산케이가 산케이했고, 검찰이 검찰했을 따름”인데 아마 입장을 표명하기도 난감했을 것이다. 국가수반을 모욕하는 쓰레기 기사를 쓴 일본인 기자와 대통령 심기를 살펴 기소한 검사 중 누군가를 이상형 월드컵에서 꼭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나 또한 당연히 침묵하였다. 당시 우리의 침묵이 값비싼 대가로 돌아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후 대통령비서실장은 동아일보 기자를 고소하였고, 세계일보는 사장이 해임되었으며, KBS든 MBC든 정부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단 하나의 기사, 단 한 명의 기자, 단 한 개의 언론사를 정부가 ‘응징’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다음 타깃은 누구든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설령 그 기사가 아무리 허접한 혐한 쓰레기 기사여도 말이다.

가토 전 지국장이 결국 한국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후, <왜 나는 한국에 승리하였나. 박근혜 정권과의 500일 전쟁>이라는 책을 출간하고 일본 전역에서 지금도 열심히 강연 중이라는 허탈한 에필로그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마치 우물에 한 방울의 독이 떨어져 퍼진 것처럼, 정부가 언론을 쉽사리 고소하고 ‘응징’을 시도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언론사들은 이미 조심스러운 스텝을 뗄 것이며 기자들은 자기 검열을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는 한국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쇠락한 시기로서, 프리덤 하우스나 V-Dem 등의 국제지표에서 1987년 이후 언론자유의 최저점을 보여준 때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우리 모두가 침묵한 탓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대통령 동남아 순방에서 MBC 취재진의 전용기 탑승을 ‘불허’한 대통령실의 결정은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나 우리 언론의 양적 질적 발전을 정면으로 역행하는 매우 의아한 결정이었다. 대통령실은 MBC에서 “최근 외교 관련 왜곡·편파 보도가 반복되어 온 점”을 이유로 들었는데, 여기서 “바이든”이 맞는지 “날리면”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쓰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보도 내용이 언론사에 대한 응징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되며, 이는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기 때문이다. 또한, 왜곡·편파 보도, 나아가 가짜뉴스에 대한 정부 나름의 판단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판단을 근거로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응징의 주체가 되는 것은 전혀 정부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엄연히 언론중재위원회를 통한 절차도 있고, 심지어 형사적 판단도 구할 수 있겠지만, 당장 해외 취재를 앞두고 MBC에 탑승불가를 통보한 것은, 과거의 기사를 이유로 미래의 취재에 구제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힌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언론사들이 침묵하지만은 않았다.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전용기 탑승을 거부하고 민항기를 이용한 해외 순방 취재로 MBC와의 연대를 표시했고 대통령실 출입기자단을 포함한 모든 언론이 예외없이 정부의 결정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다. 다만 침묵하지 않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는 어쩌면 언론의 역할이 새삼 더 중요해진 국면이 다가온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나 당연한 가치가 무시되면, 너무나 당연한 말 이상은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은 침묵을 깨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행동과 용기로 당연한 말을 끊기지 않고 끈기 있게 해나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용기 탑승을 포기하고 민항기를 탄 채, 험난한 취재길에 올랐던 젊은 기자들의 자존심(“가오”)을 생각한다. 이들이라면 정부와 독자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필요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 우연찮게도 이들의 어깨에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가 걸려 있게 된 셈이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연재 | 박원호 칼럼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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