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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2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경북 북부지방의 사투리는 부산이나 대구의 말투와는 확연히 다르다. “점심 먹었습니까?”가 안동과 예천 지방에서는 “점심 먹었니껴?”가 된다. 내가 유소년기에 습득한 언어가 그것이다. 아주 가끔씩 안상학 시인과 나는 그 무슨 암호 같은 그런 말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다. “올해 설에도 연락할라이껴?” 하고 그가 물으면 “그라이시더” 하고 대답하면 된다.
명절 때 어머니가 계시는 안동으로 가서 차례를 지내고 나면 귀향한 탕아 같은 시인 몇몇이 술집으로 모인다. 오래전부터 이영광과 안상학,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흐릿한 사투리로 술잔을 나누는 일이 잦아졌다. 일찍이 고향을 떠난 나는 그때만큼은 어설프게 경상도 사람이 된다.
안상학은 나보다 한 살 아래 후배 시인인데,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당선작 ‘1987년 11월의 신천’은 80년대의 어두운 도시 풍경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한 역작이다. 그동안 다섯 권의 시집을 냈으니 아주 부지런히 시를 쓴 것은 아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는 내가 보기에 좀 떠들썩하게 잘 노는 시인이다. 안상학이 한때 전주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같은 고향 까마귀인 나도 나지만 그가 따르는 박남준 시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창훈에 따르면 둘 사이가 ‘심상찮을’ 정도로 가깝다. 박남준과 안상학은 1991년에 처음 만나서 단박에 친해진 사이다. 시가 아니라 서로의 노래 때문에 한통속으로 묶였다. 그로부터 10년쯤 뒤 박남준과 내통하고 있던 충청도 주당파의 유용주, 한창훈, 이정록과 어울려 술판을 주름잡고 다녔다. 그와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는 김해자, 오수연, 함순례 등도 꽤나 가까워 보인다. 그의 문단 교류는 문학보다는 술에 더 기울어진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안상학의 시업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그는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안동에서 권정생문화재단 사무처장으로 6년 넘게 일했다. 선생님이 타계하시기 전, 2007년에 그는 서울로 이사를 하기 위해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선생님은 서울행을 말리셨다.
“서울은 뭐 할라고 가노. 그냥 촌에 어디 밭 한 뙈기 사서 컨테이너 놓고 글 쓰면서 살면 되지. 어디 밭이나 한번 알아봐라.”
“제가 무슨 돈이 있어서 밭을 사니껴. 더 늦기 전에 다른 데 가서 한번 살아보고 싶어요. 짐도 다 쌌어요. 방도 구해 놨고요.”
그러자 선생님은 벽에 걸린 서류꽂이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거기에는 출판사에서 인세로 받은 자기앞수표 100만원이 들어 있었다. 권 선생님은 서울 가서 살림살이 장만하는 데 보태라고 쥐여주었으나 안상학은 받아들 수가 없었다. 실랑이를 하던 끝에 선생님이 말했다.
“그러면 내 볼에 뽀뽀나 한번 해주면 되잖나.”
안상학은 선생님을 안고 소리가 나게 볼에 입을 맞춰드렸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에 권정생 선생은 운명하셨고, 안상학은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고 추모 사업을 하는 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작년에 그는 다섯 번째 시집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로 제7회 권정생창작기금을 받았다.
“권 선생님이 내게 밭뙈기 사라고 상금을 쥐여주신 것만 같아서 가슴이 아파요.”
안상학의 두 번째 시집 제목이 <안동소주>다. 그래서 그는 ‘안동소주 시인’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시집에는 그의 아버지가 많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인생은 오토바이 바퀴에서 그쳤다./ 달구지 하나 없는 화전민으로 살다가/ 지게 지고 안동으로 이사 나온 뒤/ 아버지의 인생은 손수레 바퀴였다./ 채소장수에서 술배달꾼으로 옮겨갔을 땐/ 아버지의 인생은 짐실이 자전거 바퀴였다.”
그의 아버지는 꽤나 낙천적이고 성실한 분이었다고 한다. 입만 떼면 주위 사람들이 배를 잡고 쓰러질 지경이었으니 입담 또한 상당한 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한번 찾아온 가난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다. 안상학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상처를 하고 병구완으로 전 재산을 날리고 빚만 잔뜩 얻은 채로 줄곧 가난에 허덕였다. 개똥밭에 소똥 구르듯 하며 자식들이 성장했을 때는 난데없는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고 5년간 자리보전하다가 세상을 떴다.
안상학은 술을 즐기면서 술자리에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한다. 의외로 어린 시절에는 늘 우울해 보이고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생활통지표에 그런 내용의 기록이 6년간 이어졌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막내를 낳은 어머니는 돌아서서 병을 얻고 3년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짐작이 간다. 생활환경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초등 시절 줄곧 장래희망이 화가였다고 하니 믿을 수 없지만 그가 가끔 붓글씨를 쓰는 것을 보면 아주 사기는 아닌 것 같긴 하다.
그는 명리학에도 관심이 많다. 시도 그렇지만 명리에 눈을 돌린 것도 십대 시절이다. 사는 게 뭔지, 나는 누구인지 질문을 던지다가 사주 명리 서적에도 자연 손이 가더라는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운명을 아는 눈치다. 그는 자신을 자연의 일부라고 본다. 낮과 밤, 절기와 계절의 순환에 기대 인생의 모든 과정을 파악한다. 그는 내게 경고한 적도 있다. 이젠 문학에만 온전히 귀의하라고. 과욕을 버리라고.
안상학은 어느 글에선가 고향을 얼레로 표현한 적이 있다. 까마득한 창공을 나는 연은 저 혼자 자유로운 것 같지만 실은 얼레에 묶여 있다. 고향을 떠나서 사는 삶도 마찬가지여서 쉬고 싶을 때면 얼레에 감겨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이다. 그는 입버릇처럼 고향이라는 곳은 살면 떠나고 싶고, 떠나면 돌아가 살고 싶은 곳이라고 한다.
안상학의 시에는 그런 애증의 고향 사람들과 풍경, 정서가 도처에 녹아 있다. 아마도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직을 그만두면 그는 또 안동 어디 주막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가끔 나도 거기 등장하겠지만 말이다. 지금은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딸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그에게 한마디 던져주고 싶다.
“마이 마시더라도 아프지만 마시더!”
안도현 우석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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