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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가 실물을 내놓기 전까지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이념의 문제였다. 정권이 역사관을 독점하면 안된다는 생각, 미래세대에게 하나의 역사관을 강요해선 안된다는 생각. 국정 역사교과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무기로 싸웠다.

전선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높은 국정화 반대여론을 바꾸기 위해 완성도 있는 교과서를 만들겠지만 현대사에 교묘한 편향과 왜곡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2016년 11월28일 현장검토본 발표 후 깨졌다. 사람들은 이제 “이게 교과서냐”고 묻는다.

국정 역사교과서를 만든 이들은 최신 연구 대신 수십년 전 폐기된 학설을 인용하고, 조선 대표 실학자를 소개하며 다른 이의 영정(인물그림)을 썼으며 좌우가 바뀐 사진을 원사료인 양 실었다. 교육부가 지적을 받아들여 현장검토본에서 수정했다고 밝힌 오류 건수만 760건인데, 민족문제연구소는 현장검토본과 공개된 최종본을 일일이 대조한 결과 실제 수정 건수는 1072건이라고 밝혔다. 전국역사교사모임은 최종본에 653개의 오류가 더 있다고 밝혔다. 교육부는 그중 일부만 수용하고 나머지는 “견해 차이”라며 버티고 있다. 교육부 말대로라면 견해가 다를 수 있는 내용을 교과서에 실었다는 뜻이다. 수능시험에라도 나오면 당장 소송감이다.

이준식 교육부 장관(왼쪽)이 21일 국회에서 열린 교육문화체육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어떤 국정교과서 찬성론자들은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을 강조한 것이 왜 문제냐”고 한다. 아쉽게도 국정교과서는 그런 차원을 넘어섰다.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제 팩트로 싸운다. 교과서가 무기다. 현대사 부분까지 가기도 전에 교과서는 놀랄 만한 수준을 드러낸다. 세계 민주국가들의 교과서 발행체제를 공부하며 국정화 비판 논리를 준비하던 역사학자와 교사들은 상대를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사실에 실소를 짓고 있다. 한 지인이 “그래도 아까우니 한국어 교재로 활용하면 어떠냐”고 했다. 국립국어원이 단 1주일 동안 어문규범을 감수한 결과 <한국사>에서만 1436건의 비문과 오탈자, 표기 오류가 발견됐다. 한글교재로도 못 쓴다.

국정교과서는 교육부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청와대가 시켰고 여당이 온 힘을 다해 뛰었다. 공무원이 뜻을 거스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진짜 잘못은 국정교과서 발표 이후부터다. 국정교과서는 교육부에서 인정한 부분만을 봐도 불량품으로 드러났다. 그사이 ‘주문자’는 국회에서 탄핵당했다. 촛불광장에선 수백만명이 얼굴을 드러내고 “국정교과서 폐기”를 외쳤다. 교육부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했다면, 선의로 했으나 잘못 만들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반성했다면 그때라도 멈췄어야 했다. 교육부 공무원들이 하기 힘들었다면 몇개월 뒤 떠날 장관이 탄핵국면과 여론을 핑계로라도 이용해 교육부의 자존심을 지켰어야 했다.

교육부는 느닷없이 ‘다양성’이 중요하다며 국·검정혼용제를 발표해 국정교과서의 생명을 연장하고, 연구학교를 운영하겠다며 가산점과 돈으로 교사들을 유인하다 그마저도 안되니 보조교재로 뿌리겠다고 밝혔다. 교육부 장관은 행자부 장관과 법무부 차관을 대동하고 연구학교 신청을 막는 외부세력이 있다며 “법적 조치”를 운운했다. 겁쟁이들은 늘 “두고보자”고 한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기적 같은 기회를 교육부는 최선을 다해 걷어찼다.

대선 후보들은 교육부 폐지와 개편을 말하고 있다. 교육부가 정말 문을 닫게 된다면 이준식 장관과 현 간부들의 책임이 팔할이다. 소외계층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꽃다발을 주고, 전국의 학교현장을 찾아다니며 덕담을 건넨 시간을 떠올리며 장관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그때 교육부가 받은 박수는 장관이 아니라, 보도자료에 이름 한 줄 나오지 않는 공무원들이 헌신한 결과다. 공약은 ‘공약(空約)’이 되기 십상이고 교육부는 인사물갈이로 개편을 대신할지도 모른다. 어떤 결과든 이런 교육부는 마지막이길 바란다.

장은교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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