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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바둑 9단 이세돌이 처음 인공지능 알파고의 바둑 도전을 수락하면서 전승을 자신했을 때, 사람들은 ‘같은 인간으로서’ 그를 응원하면서도 내심 불안한 감정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저렇게 자신만만해도 되는 걸까?’ 나는 바둑을 잘 모르지만, 인문학 분야의 번역 작업을 떠올리며 이세돌의 자신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령 구글번역기가 정교해졌다고 하지만, 인문사회 분야의 복잡한 영어 문장을 번역기에 입력해서 얻은 한글 번역문장은 읽어주기 힘든 수준이다. 만약 구글번역기가 내게 번역 작업에 대해 도전장을 내밀었다 해도 나는 이세돌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 같다. 이세돌이 알파고와의 첫 대국에서 패해 느꼈을 당혹감 역시 나는 그와 같은 식으로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예컨대 구글번역기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복잡하고 미묘한 영어 문장들을 나보다 더 매끈하고 이해하기 쉬운 한글 문장으로 옮겨냈을 경우 겪게 될 충격과 비슷하지 않을까?

실제로 구글의 개발자들은 최근 알파고의 딥러닝 기술을 구글번역기의 혁신적 기능 개발을 위해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일말의 의구심은 남지만, 바둑의 천문학적 경우의 수를 파악해 프로 9단 이세돌을 압도할 정도의 인공지능 기술이 적용될 경우 번역의 완성도를 인간 수준으로 높이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번역 역시 문장의 복잡성에 따라 경우의 수가 크게 늘어날 뿐인, 서로 다른 언어 사이의 통계적 치환 작업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적인 은유나 수사법적 표현의 경우도 대부분 관용적 어법의 테두리 안에서 선택되기 마련이다. 직업 번역가나 통역사들에게는 미안한 얘기가 될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고성능 번역기가 눈앞에 나타날 경우 놀랍기는 하겠지만 반갑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에도 별다른 거부감이 일어나지 않았다.

홍석현 바둑협회장이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시상식에서 알파고에게 명예9단 단증을 수여하고 있다._경향DB

흔히 인공지능이 예술과 감성의 영역은 넘볼 수 없으리라고 예단하고는 하지만, 영화나 미디어아트를 비롯해 음악의 경우에도 알파고와 같은 존재는 오래전부터 이미 익숙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종종 의식되지 않는 듯하지만, 음악만큼 첨단 기술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거리낌 없이 수용해 온 예술분야도 없을 것이다. CD에서 MP3, 그리고 온라인 스트리밍에 이르기까지 음악 매체의 디지털화가 오래전에 완결됐다는 사실은 둘째로 하더라도 오늘날 작곡이나 편곡, 연주와 녹음에 이르기까지 직업적 음악 생산의 전 과정에서 인공지능으로서의 컴퓨터가 개입하지 않는 경우란 사실상 없다. 인간을 대체한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할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만, 컴퓨터 가상 악기의 라이브 무대 투입으로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대거 해고되는 사태 때문에 브로드웨이 뮤지컬계에서 한창 논란이 벌어졌던 게 벌써 10여년 전의 일이다.

이러한 인공지능 음악가들에 맞서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더 우월한 천재성과 연주력을 갖춘 인간을 내세워 이에는 이, 새로운 기술적 ‘능력’에 맞서는 인간의 한 단계 높은 초인적 ‘능력’을 과시하는 전략이다. 콩쿠르 등의 제도를 통해 초절기교로 무장한 연주자들을 키운 지난 세기의 전략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음악 정신과 예술 정신을 불필요한 긴장 속에 빠져들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 이세돌도 알파고에 진 마당에 좀 더 다른 전략을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 아닐까?

이를테면, 인간이 구글번역기와 번역 능력을 경쟁하려 들기보다는 녀석의 실용적 기능을 빌려 한껏 용이해진 국제적 소통의 폭을 넓히는 대신 한동안 잃어버렸던 언어의 유희를 되찾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노래를 ‘영언(永言)’, 길게 늘인 말이라고 했다. 구글번역기 덕분에 우리도 다시 길게 말을 늘여 일상을 노래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면 섣부른 망상일까? 만일 인공지능이 인간의 예술을 흉내낼 수 없다는 말이 옳다면, 그것은 예술적 인간이 가진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의 무엇 때문일 것이다. 미학자 크리스토프 멘케가 역설적으로 말하듯 예술적 주체가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음’이 아니다. 그는 기능 없음, 곧 ‘할 수 없음’을 할 수 있다.


최유준 | 전남대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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