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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인간의 적

opinionX 2016. 3. 30. 21:00

친구야, 오늘은 너에게 아마 네가 읽어본 적이 없을 모옌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단편소설 <아들의 적>을 들려주고 싶구나. 어느 날 한 여인 앞에 아들의 동료 병사들이 시체 한 구를 가지고 오지. 그리고 여인에게 이 시체가 아들이 맞는지를 묻는단다. 여인이 아들임을 확인해 주면 정성껏 장례를 치러줄 테고 아들이 아니라고 일러주면 아마도 그들은 들개나 물어뜯으라며 길가에 아무렇게나 그 시체를 버려두겠지. 다른 사람은 알아볼 수 없다 해도 여인만은 단번에 그 시체가 아들이 아님을 알게 되지.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여인은 죽은 병사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본단다.

그러면서 미간에 관통상을 입고 죽은 시체를 자세히 묘사하는 문장이 이어지는데 이 문장들이 미묘한 떨림을 전달해주지. 마치 마르케스의 소설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익사체>에 등장하는 시체를 바라보는 여인들의 시선에서처럼, 로런스의 소설 <국화 냄새>에서 죽은 광부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는 아내의 시선에서처럼 경탄이라 해도 좋을 감정까지 느낄 수 있어.

모옌이 이 장면을 참혹하고 끔찍하게만 그리지 않은 이유는 죽은 적군 병사의 얼굴에서라도 아들의 얼굴을 연상해보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간절한 심정을 그 문장들에 새겨넣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아들 또래의 사내만 보아도 아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보통의 어머니들이 그러듯이 말이야.

이윽고 여인은 대담하게도 죽은 병사의 손목을 들어 올리지. 그리고 유별나게 굵고 거친 손가락 마디를 알아본단다. 담뱃진에 찌든 손바닥의 굳은살까지도 알아보면서 여인은 이렇게 중얼거려. “이 역시 고생을 많이 겪어 본 아이였구나!” 바로 이 장면, 여인의 마음속에서 적군의 병사를 자신의 아들과 최초로 동일시하게 되는 이 장면이 내게 서글프고도 아름답게 다가오는 이유는 가난하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사람들끼리만의 무언의 연대의식을 굵고 거친 손가락,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 등을 통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한 수도원 인근 언덕에서 예수의 십자가 고행을 재현하는 폴란드 청년들_AP연합뉴스


잠시 상념에 잠겼던 여인은 죽은 병사의 속삭임을 환청으로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지. 그리고 죽은 병사의 뺨에 얼굴을 갖다 대며 이렇게 말해. “그래, 얘야, 넌 바로 내 아들이야.” 자신의 아들을 총으로 쏴 죽였을지도 모르는 적군 병사를 아들로 인정하기까지의 과정이 소설의 주요 내용인데 이 소설의 절정은 여인의 깨달음과 용기, 다시 말해 자기 앞에 놓인 적군 병사의 시체와 어딘가에 죽어 있을 자신의 아들의 본질적 동일성을 깨닫는 그 순간의 참혹한 진실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겠지.

내가 너에게 이 소설을 들려주고 싶었던 이유는 언젠가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라서였어. 그날 우리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정말 가까이 하기 어려운 인간이란 누구일까를 생각해 보았지. 다양한 악인들이 떠올랐어. 곁에 있다고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지는 종류의 악당들을 하나씩 언급하면서 다시 한 번 그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

놀라웠던 건 그렇게 하나하나 호명하면서 곱씹으니 이해하지 못할 인간이 없다는 사실이었지. 단 하나 인간의 욕망을 날것으로 체현했다고 여겨지는 어떤 정당의 지지자들만 빼고 말이야. 그렇지만 친구야 나는 이제 그날의 대화에서 그이들을 가까이 할 수 없고 결코 이해할 수도 없는 최후의 악인으로 인정했던 견해를 철회하고 싶구나.

설령 누군가가 심각한 과오를 저질렀다 해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언덕을 오르면서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모르나이다”라고 기도했던 것처럼 정말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알지 못하는 이들이라면 소설의 여인이 보여준 것과 같은 깨달음의 순간을 언젠가는 만나게 될 거라고 믿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만약 정말로 인간의 적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알면서도 저지르는 자일 것이며, 그자들이 누구인지는 너 역시 잘 알 것이라 믿기에 이만 줄이려 한다.


손홍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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