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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선출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수락 연설에서 가장 눈길을 끈 단어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약탈’이었다. 원문을 보자. “문재인 정권의 소득주도성장과 부동산 폭등은 ‘재산 약탈’입니다. 악성 포퓰리즘은 ‘세금 약탈’입니다. 1000조가 넘는 국가채무는 ‘미래 약탈’입니다.” 연설의 결론은 “ ‘약탈의 대한민국’에서 ‘공정의 대한민국’으로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연설에서 약탈이라는 단어는 여덟 번이나 등장했다. 약탈은 그의 일관된 문제의식인 것으로 보인다. 6월29일 출마선언에서도 “부패하고 무능한 세력의 집권 연장과 국민 약탈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고, 최근에는 대장동 특혜개발 의혹과 관련해 “이재명 패밀리의 국민 약탈”을 막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약탈이라는 단어는 우연히 쓰인 것이 아닐 터이다.

‘약탈’이라고 하면 한밤중에 화적 떼가 말을 타고 나타나 마을에 불을 지르고 식량을 빼앗아가는 장면이 떠오르지만, 현대 정치에서도 ‘약탈 정치(politics of plunder)’는 중요한 화두이다. 여기서 약탈은 한 집단으로부터 자원을 걷어서 정치적 우군인 다른 집단에 주는 행위를 뜻한다. 가장 자주 동원되는 수단은 총칼이 아니라 세금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수많은 규제가 만들어지고 시민의 자유는 그만큼 줄어든다.

약탈 정치라는 화두에 윤 후보의 연설을 대입해 보면 그가 느끼는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대략은 알 수 있다. 자영업자에게 고통을 안긴 최저임금 인상과 26번의 부동산 대책 등 수많은 규제가 모두 실패한 결과 가진 사람은 세금 폭탄을 맞고, 못 가진 사람은 자산 형성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가 세금 약탈이라고 한 ‘악성 포퓰리즘’은 아마도 이재명 후보의 기본 시리즈를 겨냥했을 것이다.

기본소득의 가장 주요한 재원인 국토보유세는 가진 사람으로부터 걷어서 모두에게 나눠준다는 것이므로 약탈 정치의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의 재정건전성만 내세우면서 부담을 미래 정부로 떠넘기는 것은 미래 세대의 자원을 무책임하게 당겨쓰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미래 세대의 다수는 투표권이 없으므로 어떤 방식으로도 이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심각한 세대 간 정의의 문제를 안고 있기도 하다.

비록 약탈이라는 살벌한 단어를 앞세워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거친 공격으로만 들릴 수 있으나, 그의 문제의식은 나름 자유주의 진영에서 족보를 가지고 있고 지난 4년반 현실의 한 부분을 잘 포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나는 그의 문제제기를 국민들에게 판단을 받아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확인해야 할 것은 그의 대안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후보수락 연설에는 다음과 같은 답이 나온다. “대한민국 성장엔진을 다시 가동하겠습니다. 시장은 만능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국가주도 경제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기업의 창의와 혁신입니다.” 즉 규제 완화와 기업 지원을 통해 성장을 이끌어내겠다는 것이다. 시장에 맡기지 않는 것은 곧 국가주도 경제라는 낡은 인식도 눈에 띈다. 문제제기는 정당한데 대안은 부실하다. 이명박 정부의 낙수효과와 무엇이 다른가. 이 해법만으로는 약탈 정치를 끝내겠다는 그의 서사는 완결되지 않는다.

진보 정치가 약탈 정치라는 그의 인식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분배를 개선하고 불평등을 완화하고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데에 진보나 보수 할 것 없이 무관심했고, 더 나아가 정치적 양극화를 적극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진보는 사회적 합의를 만들기보다는 과거 청산에 집착했다. 합의가 없는 사회에서 분배를 개선하려면 국민의 일부를 적폐로 낙인찍어 공격적 과세를 하는 것이 논리적 귀결이다. 약탈 정치의 필연성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무턱대고 시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효율성을 어떻게 해서 모두를 위해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상위 1%를 낙인찍어 공격적 과세를 하는 것은 약탈적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완전한 시장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반공동체적이다. 부자일수록 더 많은 세금을 내되 모든 국민이 형편에 따라 작은 기여라도 하도록 하고, 더 많은 기여를 한 사람에게 적폐라는 비난이 아니라 사회적 존중과 감사를 돌려주고, 그렇게 모두가 함께 변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왜 모두에게 좋은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약탈 정치를 끝내겠다는 그의 서사는 완결될 것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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