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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권력자 대통령의 비서실장 위상은 여전히 유별하다. 낡은 비유를 빌리면, ‘권부의 꽃’이기도 하고 ‘행정부의 최악의 직책’이기도 하다. 시대와 정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불변의 롤 모델이 서기도 어렵다. 이후락, 김정렴, 노재봉, 박관용, 한승수, 김중권, 박지원, 문희상, 문재인, 임태희 등. 40여명의 역대 비서실장 중 ‘비서실장으로서 역할과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한 인물은 누구일까. 한국행정연구원이 2013년 가을 대통령 비서실 연구의 일환으로 전문가 집단을 대상으로 심층조사를 실시했다. 내로라하는 인사들을 제치고 노무현 대통령의 문재인 비서실장이 맨 윗줄에 올랐다. ‘위임 권한을 적절히 수행하며 권력비리와 멀었던 점’ ‘충성심’ ‘직언’ 등이 이유로 지목됐으나, 최다 의견은 ‘시민사회 등과 원활한 소통을 통해 여론을 수렴하며 대통령에게 잘 전달하고, 대통령의 의중을 각 부처 및 비서실에 정직하게 전달’에 두어졌다. 다음 순위의 박지원 비서실장은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 한승수는 ‘전문성과 정책적 역량’, 이후락은 ‘충성심과 강한 리더십’, 최장수 비서실장 김정렴은 ‘대통령 국정철학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지목됐다. ‘문재인 비서실장’의 차별점이 확연하다.

남북공동선언 이행추진위원장인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10월 17일 오후 강원도 철원군 육군 5사단 비무장지대 GP초소 앞에서 군 관계자로부터 브리핑을 듣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묵은 비서실장 연구를 꺼낸 것은 어느 유형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참으로 낯선 임종석 비서실장의 행보 때문이다. 임 실장이 대통령 유럽 순방 기간 중 정부의 외교·안보 참모들을 대동하고 DMZ를 시찰한 광경은 강렬하다 못해 자극적이다. 국가 의전서열이 더 높은 국정원장, 국방부 장관과 통일부 장관 등을 거느리고 “군을 격려하기 위한 방문”을 실시했다. 임 실장의 내레이션을 입힌 DMZ 방문 영상은 청와대 홈페이지 첫 장을 장식했다. 여태껏 본 적이 없는 비서실장의 동선이다. ‘그림자 보좌’의 역할과 당위에 익숙한 시선으로 보면 ‘임종석 비서실장’은 분명 특별하다. DMZ 시찰도 ‘자기 정치’라기보다는 위임된 권한을 창의적으로 수행한 결과다. 그만큼 통일, 외교, 안보, 행정, 대국회 등 전방면에서 직접 ‘무대’에 올라 활약하는 대통령 비서실장은 없었다. 특히 남북 문제에서는 대통령 다음의 ‘주인공’이다. 판문점 회담 당시 수행단의 맨 앞에 선 비서실장, 북한 김여정 특사단의 환송만찬을 직접 주재하는 비서실장이 상징하는 바다. 권력의 지표라 할 ‘인사’에서도 임 실장의 비중은 강력하다.

‘힘 센’ 비서실장은 여론시장에 곧바로 투영된다. ‘시사저널’이 매년 전문가조사를 통해 발표하는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전체 영향력 조사에서 임 실장은 문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다음으로 3위에 올랐다. 1989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대통령비서실장으로는 최고 순위다. ‘기춘대원군’ 김기춘 비서실장(2014년 6위)도, ‘소통령’으로 불린 박지원 비서실장(2002년 7위)도 못 올라간 위치다. 비서실장이 총리와 여야 대표, 국회의장보다 ‘한국을 움직이는’ 인사에 꼽혔다. 이게 임 실장의 권력 위상일 터이다.

물론 비서실장의 힘은 결국 대통령이 정한다. ‘임종석 비서실장’의 힘은 문 대통령의 신뢰와 권한 위임에서 나올 터이다. 경계는 위임받은 권한을 넘어 스스로 권력화하는 단계이다. 점점 커지는 야당의 공세와 여권 내 견제 기류는, 한편으로 권력화하는 비서실장의 징후가 움트기 때문일지 모른다. 과거 정부에서 대통령이, 총리가, 장관이 하던 것을 비서실장이 직접 하게 될 경우 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미래권력 반열에 오르고, 막강 권한을 위임받았다 하더라도 비서실장에서 ‘비서’를 떼낼 수는 없다. 시민사회 등과 소통을 통해 여론을 ‘제대로’ 수렴하며 대통령에게 ‘잘’ 전달하고 대통령의 의중을 각 부처 및 비서실에 ‘정직하게’ 전달하는 것, 여전히 비서실장 최고 덕목이다.

(문재인처럼) 유연하고 온화한 리더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을 보완할 (임종석처럼) 실력과 정무감각, 열정으로 뭉친 람 이매뉴얼을 초대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발탁했다. 당시 ‘뉴스위크’가 백악관 비서실장을 두 차례 역임한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에게 신임 비서실장에 대한 조언을 요청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은 행정부에서 최악의 직책을 맡았다고 말했다. 그는 워싱턴에서 두 번째로 막강한 인물일지 모르지만 참모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런 말도 들려줬다. ‘당신은 몸 앞과 뒤에 큰 표적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 누구도 당신을 선출하지 않았으며 당신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사람들은 원치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야권은 물론 슬슬 여권에서도 표적이 되고 있는 ‘임종석’을 ‘당신’ 자리에 놓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숙명을 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양권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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