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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양승태 대법원장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은 문화예술인과 판사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운용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처지는 확연히 다르다. 김 전 실장은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고 있고, 양 대법원장은 임기가 끝나가지만 여전히 3부 요인인 사법부 수장이다.

양 대법원장은 지난달 28일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을 추가 조사해야 된다는 전국법관대표회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는 강경했다. 그는 “법관이 사용하던 컴퓨터를 열어 조사한다면 교각살우의 우를 범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조사 가능성을 원천 차단했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하다. ‘법관’이 사용하던 컴퓨터라고 해서 일반 공무원이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컴퓨터와 특별히 다르지 않을 텐데 왜 조사할 수 없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모두 국가 예산으로 구매해 사무실에 비치한 것들이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연루자들은 특검 수사로 기소까지 된 마당에 사법부만 ‘성역’으로 둬야 하는 이유도 명확하지 않다. 파일 제목만 읽은 뒤 열람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조사방식도 무시됐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7년 4월 7일 (출처: 경향신문DB)

정작 판사 블랙리스트 당사자인 대법원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최종적으로 심리한다. 1심 법원이 3일 재판을 종결하고 이달 중순쯤 선고한다. 자신들의 블랙리스트 의혹에 관대한 사법부가 김 전 실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판단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양 대법원장이 입장을 발표하던 그날, 김 전 실장은 법정에서 신문을 받았다. 김 전 실장은 블랙리스트를 “몰랐다”며 억울하다고 했다. 실무자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김 전 실장에게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비서실장이 알지 못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가능하냐”며 날을 세웠다. 사법부에도 뼈아픈 대목이다.

차성안 판사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사법부가 블랙리스트 논란을 묻어두고 간다면 내가 판사의 직을 내려 놓을지를 고민하겠다”고 했다.

지난 4월 말 판사 블랙리스트 조사 방법을 제시하며 “저의 법적 판단이 틀렸다면 판사의 자격이 없는 것이니 사직 하겠다”던 오모 판사도 있었다. “절망스럽다” “이렇게 끝나고 마느냐”는 한숨이 판사들 사이에서 나온다.

사회부 |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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