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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대법관인 고영한 법원행정처장은 지난 3월7일 판사들을 상대로 공지글을 올렸다. 판사들의 사법개혁 논의를 저지하라는 대법원 지시를 거부한 판사의 인사가 부임 당일 취소됐다는 보도가 나온 다음날이다. “법원행정처는 해당 판사에게 연구회 활동과 관련하여 어떠한 지시를 한 적이 없다.” 거짓말이었다. 이에 대해 이 사건 진상조사위원장인 이인복 전 대법관은 4월18일 보고서에서 고의는 아니라고 했다. “정식의 확인 없이 해명글을 게시한 사정에 비추어 (중략) 사건 은폐 목적으로 볼 수 없다.”

이렇듯 신뢰하기 어렵기는 이인복 전 대법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3월24일 조사 시작 이후 이모 판사가 ‘판사 블랙리스트’ 관리를 지시받자 이를 거부하고 사표를 냈다는 진술을 받았다. 하지만 4월7일 언론에 보도될 때까지 조사 요구를 무시하고 있었다. 보도가 있고서야 법원행정처 컴퓨터와 e메일 서버를 조사하겠다면서 ‘정식의 확인 없이 해명글을 게시하는’ 고영한 처장에게 요청했다. 고영한 대법관은 당일로 거부했고 이인복 위원장도 그걸로 끝이었다.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은 이인복 위원장에게 조사 전권을 위임했다고 했다. 그러니 “전권 위임이 말뿐인 위임이거나, 대법원장이 뒤로는 행정처 기조실 컴퓨터 자료 등은 주지 말라고 행정처장에게 지시했거나”라는 판사들의 비판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블랙리스트가 관리됐다는 컴퓨터를 보지도 않은 이인복 위원장은 “사법부 블랙리스트가 존재할 가능성을 추단케 하는 어떠한 정황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결론냈다. 판사들은 “블랙리스트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도 아니고 없다는 결론이 어떻게 나오냐”고 항의했다.

전국의 법원에서 판사회의가 잇따라 소집됐다. 각급 법원의 판사들은 토론과 투표를 통해 ‘판사 블랙리스트’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결의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민형사 전문가들은 법원행정처 컴퓨터를 합법적으로 조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심지어 이인복 위원장에게 조사방법을 자문받았던 공과대학 출신 판사는 “(합법적인 조사가 가능하다는) 저의 법적 판단이 오판이라고 판명된다면 판사의 자격이 없는 것이니, 제가 마땅히 사직을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재조사 결의를 전국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열려야 했다. 판사들은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법관대표회의를 소집해달라고 했다. 이 나라에는 법원에 어떠한 일이 생겨도 대법원장의 허락이 없으면 법관들이 의사를 모을 수 없다. 어렵사리 열린 6월19일 법관대표회의에서 98명 가운데 84명 찬성으로 추가 조사를 결의했다. 이 기회에 법관대표회의도 상설화하자고 했다. 그런데 양승태 대법원장은 추가 조사는 이유 없이 거부하면서, 대신 법관대표회의 상설화를 논의해보라고 했다.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을 포함한 이번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은 양승태 대법원장의 비서 조직인 법원행정처가 주도한 것이다. 진상조사위원회 보고서와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 심의에서도 인정했다. 그런데도 양승태 대법원장은 자신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조사도 안된다고 버티고 있다. 전국의 법관 2900여명이 선출한 판사 대표 100명이 하루 내내 토론해 85% 찬성으로 의결한 일이 이렇게 간단히 무시된다.

요직 중에 요직이라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으로 발탁된 젊은 판사가 블랙리스트 관리를 요구받았다. 충격에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때로는 울었다. 그렇게 힘들어하다가 양심을 지켜 불법에 가담하기를 거부하고 사표를 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고립이 계속되자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법복을 벗고 휴직했다. 알량한 법관대표회의 상설화가 이 젊은 판사의 양심을 팔아 얻는 것이라면, 나는 상설화에 반대한다. 지금 보고 있는 대법원의 타락도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면서 시작된 것이다.

사회부 | 이범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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