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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새 세상을 꿈꿨던 사람들의 잊혀졌던 서사가 쏟아지고 있다. 1970~1980년대 강렬했던 혁명의 기억이다. 하나같이 아픈 기억으로 돌아왔다.

1991년 그해 봄은 잔인했다. 4월3일 천세용, 26일 강경대, 29일 박승희, 5월1일 김영균…. 막바지에 다다른 노태우 정권은 수많은 청춘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는 5월8일 공안통치에 항거하며 서강대 본관 5층 옥상에서 분신했다. 정권은 김씨의 유서 2장을 위기돌파용 카드로 삼았다. 검찰이 김씨의 전민련 동료 강기훈씨를 유서대필자로 지목해 기소한 것이다. 지난 7일 법원은 유서대필 조작사건 희생자 강기훈씨에게 국가의 민사 보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심 무죄 판결 2년, 사건 발생 26년 만이다. 하지만 국가와 문서감정인의 손해배상 책임만 인정했을 뿐 위법수사를 지휘했던 검사들 책임은 묻지 않았다. 시효 종결이 이유였다. 강씨는 짐작이나 했을까. 고작 6억원 보상에 26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했을 거라고.

강씨에게 위로 메시지만 보냈을 뿐 차마 심경까진 묻지 못했다. 강씨는 “26년간 이토록 집요하게 국가, 사법부, 검찰이 약올리고 불리하면 시간을 끌고 이젠 잔머리까지 쓴다”고 했다. 강씨의 26년은 암흑이었다. 반면 당시 김기춘 법무부 장관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강신욱 강력부장은 대법관으로, 곽상도 수사검사는 청와대 민정수석, 국회의원으로 승승장구했다. 강씨는 그 세월을 “(1994년) 출소 후 3년은 복수심이 그 후 10년은 분노가 일상을 지배했다. 15년이 넘어가던 때 인간사에 회의가 시작됐다. 스무 해 되던 5월 내가 엎어졌다”고 돌아봤다. 강씨는 간암 투병 중이다. 몇 해 전 전남에 내려가 “밤하늘 쳐다보는 낙”으로 살며 병을 다스리고 있다.

긴급조치 시대, 오직 민주주의라는 첫사랑만 품고 살았던 ‘영초언니’는 코스모스 같았던 사람이었다. “민주주의 쟁취, 독재타도”를 외치고 교도관들에게 입이 틀어막히면서도 불의한 권력과 맞짱 떴던, 후배들에게 전태일과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과 담배 맛을 가르쳤던 ‘영초언니.’ 그녀가 2002년 캐나다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두 눈을 잃고 뇌 기능의 70%를 잃은 채 나타났다. ‘영초언니’는 간혹 옛일을 떠올렸지만 귀퉁이만 맴돌았다.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나선 순간 흘러간 가요 한 곡이 골목에 울려퍼졌다. ‘어느 꿈같은 봄날에 처음 그대를 만난 날부터…’로 시작되는 노래였다. 일행 모두는 영초가 누군지, 영초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온전히  기억해내리라 다짐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책 <영초언니>를 통해 ‘영초언니’의 어느 꿈같은 봄날을 가장 먼저 세상에 알렸다.

이제라도 이들의 기억을 불러올리게 된 건 지난해 광장을 밝혔던 촛불 때문일 테다. 보수정권은 이들의 상처를 비틀고 공격하기 일쑤였다. 검찰이 불처벌의 역사를 누리게 된 배경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내에 못다 한 과거사 진실규명을 약속했다. 강기훈씨와 영초언니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첫걸음이다. 보태자면 과거사 진실규명의 최종 목표는 오늘을 밝히기 위해서다. 사회적 약자들의 이름과 몸값이 당대에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최근 문 대통령 일부 지지자들이 버스 노동자 해고를 규탄하는 민주노총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9년 동안 찍소리 못하다가 1년을 못 참고 국민 눈을 어지럽히냐”고 했다. ‘세대(정권)가 바뀔 때마다 새로 훈련을 받아야 한다’(어슐러 르귄, <빼앗긴 자들> 중)는 말로 돌려주고 싶다. 오죽하면 강씨가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세상이 달라진다 믿는 건 판타지”라고 했을까. 어쩌면 문재인 정부의 신주류 ‘486’ 그룹도 이런 차원에선 우리 사회의 1%일지 모른다. 강기훈씨와 영초언니처럼 혁명세대 99%는 여전히 가난과 고통을 짊어진 채 지하로 흐르는 물처럼 살고 있다. 우리는 아직, 새 시대 첫차를 타기 위해 환승역에 도착했을 뿐이다.

구혜영 |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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