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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의 엔지니어들에 대한 문헌과 구술을 모으고 있다. 왕년은 1970년대 이후 조선산업, 석유화학산업, 자동차산업 등을 개척했던 사람들의 시대를 말한다. 공기업이었던 충주비료에 근무했던 대전 엔지니어 정모씨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고급 엔지니어는 부족했고 새로 공장을 짓거나 운영하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해결사’ 역할을 맡았다. 발령이 날 때마다 이주해가며 근무를 했던 것. 정씨는 충주 외에도 울산, 여수를 전전하며 현장 근무를 했다. 그는 상공부에 가서 따졌다. “21년 동안 현장 근무만 하고, 서울 근무는 한 번도 못해 봤습니다. 왜 나를 시골에만 처박아 두는 것입니까?” 며칠 전 창원 산단에 대한 다큐를 보다가도 왕년의 엔지니어 한 명은 병역특례가 5년이라 ‘어쩔 수 없이’ 왔다는 말을 듣는다. 그 ‘어쩔 수 없이’라는 말이 자꾸 곱씹힌다.

셔틀버스와 KTX를 타고 주말마다 서울로 향하는 젊은 엔지니어들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국 어디에서든 수많은 노동자들, ‘유수의 공학인력’들이 일자리를 찾아갔다. 벌이가 되었기 때문에, 도전할 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산업도시에 간 사람들은 뿌리를 내리고 2세대를 보내는 중이다. 일부는 서울로 떠났지만, 많은 사람들은 가족 단위로 뿌리를 내리면서 각각의 산업도시도 모양새를 갖췄다. 이제 산업도시 중에 예전 같은 ‘시골’은 없다. 산업이 위태로울 때마다, 자연스러운 이동보다 더 많은 인원들이 도시를 떠났을 뿐이다. 여성의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딸들이 돌아오지 않고, 결혼을 통한 여성 유입이 더뎠을 뿐이다. 사실 자연스럽게 인구를 지켜내는 것은 잘 정립된 권역의 대도시일 때만 가능한 일이다. 일자리, 정주여건뿐만 아니라 지역 자체가 전국적으로 차지하는 위상에도 영향을 받는다.

산업 위기마다 청년은 떠났고
여성을 위한 일자리는 없었다
수도권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은
지방에 혜택 준다고 오지 않아
이들을 ‘모셔올’ 고민부터 해야

현 상태에서 수도권에 살려는 사람이 많은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지금처럼 ‘서울 공화국’인 상황에서는 많은 자원과 정치적·행정적 지원을 지속적으로 투여해야만 지방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넓은 광역권을 만들자는 메가시티 등의 아이디어가 나오는 이유다.

지역균형발전의 관점에서 해법은 단순히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방식 이상이어야 한다. 적극적으로 수도권에 있으려는 사람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만들거나 ‘갈 수밖에 없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부가 경남 등 광역단체들과 함께 교육혁신 플랫폼 구축을 진행 중이다. 지역 인재들이 지역 대학에서 공부하고 지역 중점산업에 종사하게 만들도록 협업체계를 만들려고 한다. 혁신도시로 이전한 공기업들의 지역균형선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점차 지역의 대학을 나온 학생들을 많이 뽑게 됐다. 지역 대학을 살리기 위한 조치였다. 부족하다. 자칫 수도권과의 네트워크가 끊어져 인재 확보 관점에서는 다양성이 부족하고, 경쟁력의 확보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찾아간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딜레마를 호소했다. 최고 수준으로 알려진 공과대학 출신을 그룹 공채로 채용해 생산 공장 엔지니어로 배치하면, 3년차 이내에 많은 숫자가 수도권 회사로 이직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며 퇴사한다는 것이다. 또 공채 폐지 후에는 공장 인근 지역 대학 출신들을 채용하는데, 신입사원들이 안정적으로 다닐 것 같긴 한데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인재’를 확보했는지 아직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물론 비교해 판단하기에는 성과의 누적이 부족하다. 지역사회 일자리 창출이라는 긍정적 요소는 중요하다. 그러나 ‘다른 문화’에서 길러진 사람이 있어야 조직에 마찰도, 활력도 줄 수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이야기다.

집권여당은 행정수도 이전을 꺼내 들었다. 이번엔 행정부처뿐만 아니라 청와대도, 서울대도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여론조사를 보면 반대가 만만찮은 상황이다. 행정수도 이전 자체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지역균형발전을 위해서라면 국가기구의 이동 외에도 살펴야 할 것들이 차고 넘친다. 혁신도시가 지방도시 구도심 인구를 흡수하고 개발 호재를 일으켰음도 잊지 않아야 한다. 채용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기업의 사업장들이 10여년 동안 수도권으로 모였다는 사실도 간과해선 안 된다. 지방의 청년들에게는 일자리를 개척하고 창업 기회를 주되, 지역에 활력을 돋울 타지 출신을 ‘어쩔 수 없이’ 오게 하는 게 아니라 ‘모셔오기’ 위한 조치도 좀 더 강화해야 할 것이다. 예전에 산업체 병역특례가 그 역할을 해왔다. 공무원의 지방근무를 독려해 봐야겠지만, 기업의 현장 근무도 다시금 적극적 동인을 설계해야만 한다. 물론 타지에서 와서 일하고 정주하고 싶은 지방의 인프라와 문화를 구축하는 일이 따라야만 한다. 수도권으로의 구심력이 훨씬 더 강해지는 지금, 청년과 여성의 일자리 확보 모두 좀 더 진전된 고민으로 풀어가야 한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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