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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고산지대엔 벌써 가을

처연함에 반소매는 아무래도 짧은 것 같죠

또 언제 이렇게 되었나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첫가을이 온 것은

 

아침 해도 스치면 떨어지는 이슬을 먹으려고

산마루에 떠올랐다 그 해 있는 곳은

시의 나라에선 천공 속의 바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파도와 흰 구름과 새벽과 함께

 

이렇게 파란 배추와 무는 처음 보았네

한 번쯤 팔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게 되는 것은

다시 거둘 수 없는 생의 높이 때문일지

어른보다 먼저 아이들 얼굴에

가을이 와 있었다

 

아이들이 늘 세상과 아버지를 걱정하죠

가을은 그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또 지나가고

생채기 하나 유리금 긋는 저 고산지대

어디서 사슴의 눈도 늙어가나

고형렬(1954~)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해발 높은 곳에 파란 무와 배추가 자라고 있다. 고산지대는 기온이 보다 차고, 가을이 먼저 와 있었으리라. 그곳에서 시인은 아이의 마음같이 새파란, 신생의 시간을 만났으리라. 해는 떠오르고 지고,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가고, 아이는 어른이 된다. 기다리지 않아도 어김이 없이 그렇게 된다.

우리는 언젠가 생(生)의 고산지대에서 한 마리 사슴의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신성함과 그 높이와 이슬과도 같은 맑음과 새롭게 온 가을을. 그리고 어떤 쓸쓸함과 늙음과 쇠약함도 보게 될 것이다. 또 언제 이렇게 되었나, 라며 낮고 가만하게 말하면서.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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