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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A가 사람 B에게 묻는다. “C라는 사람 알아?” “응, 알아.” 사람 A가 재차 묻는다. “잘 알아?” 사람 B가 대답을 주저한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 A는 사람 B가 사람 C를 잘 안다고 확신한다.

사람 B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는 사람 C를 안다고 말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 사람 C에게 물어봐도 사람 B를 안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 C를 잘 안다고 말하기는 왠지 어렵고 불편하다. ‘잘’이라는 부사가 가져다주는 무게 때문에 사람 B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 C와 알고 지낸 지 5년이 훌쩍 넘었지만, 단순히 긴 시간 동안 교류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득 ‘잘’이라는 단어는 간편하면서도, 그만큼 쉽게 써서는 안되는 말처럼 느껴졌다. 안다고 말할 때는 부담 없을지 몰라도, 잘 안다고 표현할 때는 모종의 책임감이 생겨난다.

사람 B는 잠자리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들지 못한다. 어떤 사람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얼굴과 이름을 아는 사이? 연락처를 주고받은 사이? 때때로 간단한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이? 오랜만에 만나도 서슴없이 악수할 수 있는 사이?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잘 안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허심탄회하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 투정을 부려도 되는 사이? 장점은 기꺼이 칭찬해주고 결점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는 사이? 사람 B의 눈앞에 두 사람이 걸어가는 장면이 펼쳐진다. 두 사람은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두 사람이 하나의 점으로 겹쳐 보이기 시작한다. 눈을 감았다 떴더니 하나의 점이 다시 두 개가 되어 있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서로에 대해 제대로 몰랐던 사람 둘이 각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며칠이 지나고 사람 A와 사람 B는 다시 만났다. 이번에 먼저 입을 연 건 사람 B였다. 사람 B는 사람 A에게 사람 C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누군가를 잘 안다고 말하는 데는 확신이 필요하고 잘 안다는 것에 대한, 그리고 잘 안다고 말한 데 대한 책임감도 생기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서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사람 A는 놀랐다. 그가 아는 사람 B는 어떤 자리에서나 적응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사교성이 좋고 인기도 많았다. 사람 B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 격의 없이 얘기하는 모습을 무수히 목격하기도 했다. 자신이 이때껏 알아온 사람 B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 B가 누군가에 대해 얘기할 때 조심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사람 A는 처음 알았다. 사람 A는 혼잣말했다. “사람은 역시 어려워.”

사람 A는 문득 하재연의 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길게 누워 있는 섬 위의 저녁 구름에/ 서린 분홍 같은 것이었다가// 조금씩 시간이 흘러 이렇게/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 A의 혼잣말은 계속되었다. “우리는 처음에 모두 길게 누워 있는 섬이었을 것이다. 가만 바라보니 섬 위의 저녁 구름이었을지도 모른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구름에 서린 분홍 같은 것이었다.” 모르는 사이일 때, 사람은 사람에게 그저 ‘어떤 사람’이다. 어떤 사람과 만났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절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신뢰가 쌓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서로를 이해하겠다는 마음 없이 유대감은 형성되지 않는다. 이해의 과정에 오해가 끼어들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떤 사람은 ‘사람’이 되었다가 마침내 ‘한 사람’이 된다. 한 사람이 되면, 다른 누구도 그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

사람 A는 휴대전화를 열고 연락처 버튼을 누른다. 연락처들이 쏟아져 나온다. 살면서 이들과 어떤 식으로든 스쳤을 것이다. 스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번호를 주고받기 위해 어색하게 말도 몇 마디 주고받았을 것이다. 사람 A는 앞으로 ‘사람’을, 나아가 ‘한 사람’들을 주변에 많이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군중이 고독한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다. 잠시 한곳에 모였지만 곧 뿔뿔이 흩어질 거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를 알 기회도, 잘 알 기회도 얻지 못한다. 군중에서 고립되지 않기 위해, 아니 군중 속에서 끝끝내 한 사람만은 지키기 위해, 사람 A는 사람 B에게 전화를 건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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