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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쪼잔하게 굴지 말자

opinionX 2017. 9. 21. 14:26

4차 산업혁명 천국편: 공교육은 학생 10명당 교사 1명의 교육 환경을 제공하며 토론을 장려한다. 인간에 대해 깊이 이해해 갈등을 조율하는 능력을 신장하고, 창의성을 증대하기 위함이다. 한편, 공공임대주택 비율은 대폭 늘어나 전 국민이 주거 불안 없이 삶을 꾸려간다. 이 모든 사회 복지 재원 마련은 기술 발전을 통한 수익 증대분에서 충당된다. 기술 발전은 또한 인류에게 더 많은 여유 시간을 선물했다. 사람들은 낮에는 그늘에서 부서지는 볕을 보며 사색하고, 밤에는 쏟아지는 별을 보며 노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시민들은 서로를 마주 보고 어루만지며 더 나은 사회를 담대하게 상상한다.

4차 산업혁명 지옥편: 산업 현장에서 자동화 기계와 인공지능의 활용은 갈 데까지 가서, 극소수의 노동자만이 노동을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안정 노동에 몰리고, 그마저도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은 장기 적출, 인신매매 대상이 된다. 계속되는 불황으로 세계는 전쟁의 유혹에 빠지고, 임금노동을 통해 존재가치 입증이 불가능해진 인간들은 군에 동원되어 쓸모를 입증하거나, 첨단 무기에 의해 뼈도 못 추리고 사멸한다. 그렇게 인류는 멸망했다….

여러 미래학자의 저술 및 SF 창작물에 등장하는 상상에 내 것을 보태보았다. 앞으로의 세상이 지옥이 될까 봐 걱정하는 이들은 그만큼 많고, 나도 그 중 하나다.

기본소득제도 도입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는 맥락도 여기에 있다. 노동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균등하게 ‘소득’ 또는 배당금을 지급하자는 것. 사회 구성원이 사회에 축적된 부에 어떤 방식으로든 기여했다는 시각에서다. 현재 비약적인 기술 발전에 토대가 되는 데이터 축적에 소비자로서 기여한 바(구글 번역, 인공지능 스피커, 자율주행자동차 등)와, 기존 임금노동 시장 통계에 집계되지 않는 가사노동, 돌봄노동 및 시민으로서의 활발한 정치참여의 가치를 인정하자는 것. 이것은 또한 높은 확률로 예측되고 있는, 인간 없는 생산으로 일자리 자체가 극단적으로 줄어들 미래에 대한 사회적 대응이기도 하다. 임금노동자가 소수인 사회에서도 지속적으로 경제 순환이 이뤄지게끔 하고, 궁극적으로는 좀 더 행복하고 충만한 기운 넘치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 기본소득 재원은 로봇세, 탄소세 등 기술 사용으로 인한 부의 축적분과 그 과정에서 초래되는 환경 파괴에 대한 부담금으로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기본소득제도를 전 국민을 대상으로 당장 시행하기는 어려우니 청년, 노인, 장애인 등에 우선적으로 수당을 지급하고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가자는 의견에 나는 조건부 찬성한다. 그래서 ‘청년수당’ 명목의 제도를 시행하는 지방자치단체가 늘어난다는 소식에 우호적이었지만, 상당수가 사용처를 ‘검사’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시무룩해졌다. 이 제도가 개개인에게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제공하고 자율성을 발휘하게 돕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고, 혜택 받는 사람들을 심사하고 평가하는 데 비용을 쓰느니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이에게 수당을 주는 편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청년수당 사용처를 검사해야 마땅하다는 관념이 팽배해 보인다. 최근 한 온라인 언론사는 헐벗은 남녀의 사진을 첨부해 서울시 청년수당 수급자가 수당을 연인과 모텔에서 사용해 수급 자격을 잃었다는 식으로 읽히게끔 유도하는 기사를 실었고, 많은 독자들은 ‘도덕적 해이’를 질타했다. 실상은 ‘타 지역 취업 면접 시 필요할 수 있기에 모텔에 대한 사용처 규제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수급 대상자 일부가 청년수당 수급 자격을 잃었다는 사실’을 짜깁기한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청년수당을 취업 활동이 아닌 데이트비로 사용했다 하더라도 괜찮다는 입장이다. 그것 역시 경제순환에 기여하는 일 아닌가? 

게다가 언제는 청년들이 ‘혼밥’ 등 인간관계 단절로 사회적 자폐를 겪어 문제, 출산 안 해서 문제라더니. 청년들이 좀 덜 불안하고, 더 행복하게 사는 꼴 보기가 그리도 싫은가? 쪼잔하게….

우리는 급변하는 세계에 대응하기 위해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언론 및 시민들의 정책 평가 역시 미래지향적인 시각에서 이뤄지기를 희망한다.

<최서윤 아마추어 창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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