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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10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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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의 긴 연휴 동안 식구랑 근처에 생겼다는 대형 서점에 나들이 겸 산책을 갔다. 서점에는 오랜만인지라 긴 시간 책구경을 하고 몇 권의 책을 충동구매하고 나오려다보니 슬그머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었더니, 뜬금없이 ‘영어공부책’ 이야기를 꺼내신다.

‘한국어 독해도 잘 안되는 분이 웬 영어인가, 한국인의 영어강박이 70대 노인에게까지 불어닥쳤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러 가는 해외여행에서 불편함을 느끼셨나 하는 생각에 애써 고르고 골라 영어회화책 한 권을 내밀었다. 해외여행에서 맞닥뜨리는 쇼핑 등의 상황 중심으로 발음을 한글로 병기해놓은 시니어용 책자였다. “글쎄다, 너무 글자가 많은데…”라며 돋보기를 꺼내시는 엄마 옆에 서있던 언니가 냉큼 나서서 퉁을 준다. “얘얘, 엄마는 알파벳도 모르는데 이런 걸 어떻게 보라고.”

엄마를 모시고 사는 언니 말에 따르면, 엄마에게 필요한 것은 해외여행용이 아니라 A동, C동으로 구분지어진 건물이나 주차지역, 점포상호를 구분해낼 수 있는 정도의 영어란다. 어디어디로 오라고 얘기를 해도, 알파벳을 모르니 길눈도 어두운 노인들과의 약속이 어그러지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하소연이다.

추석 연휴에 만난 어린 조카에게 “오래 놀아서 좋겠네”라고 묻자, 퉁명스레 한마디 한다. “그냥 놀게 하면 좋을 텐데 선생님이 간판 200개를 조사해서 순우리말과 외래어를 분류해오래요.” 집에 돌아와 엄마 일도 있고 해서 내심 궁금해진 나는 하루 저녁 산책 삼아 번화가에 나가 간판 상호를 적어보았다.

위의 목록은 내가 사는 작은 도시의 번화가에서 무작위로 찾아 적어본 50개의 상호들이다. 의미와 상관없이 우리말로 적은 상호가 14개, 우리말과 영어 혼용이 8개, 영어 상호가 28개이다. 이 중에서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는 순우리말 상호는 ‘삼천리 자전거’ ‘꿀잠’ 등 7개에 불과하다. 한글로 써있다지만 ‘프라이덴, 웰, 다비치’ 등의 뜻을 모르니 이들 간판은 뜻 모를 깃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은행은 물론 가장 흔한 편의점, 빵집, 휴대폰 매장의 거개가 다 영어니, 어찌 영어공부가 무지한 노인들을 강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도네시아의 한 부족이 공용문자로 채택할 정도로 한글은 전 세계적으로 그 가치와 우수성을 인정받았고, 이 단순하고 과학적인 한글 덕분에 한국의 문맹률이 0%에 육박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한글에 대해 진정으로 자부심을 느끼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그 자부심이란 것이 명절에 친척들이 모여서 누구는 어디 학교를 가고, 취직하고 등의 대외 홍보용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0%에 육박한다는 한국의 문맹률은 지금 우리가 놓인 일종의 이중언어 상황에서 보자면, 거짓에 가깝다. 언어가 소통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이 이중언어 상황이 포섭하고 배제하는 독자와 청자가 누구인지는 금세 알 수 있다. 잘살지 못하고 그래서 배우지 못한 자들, 첨단 문화에 어두운 자들과 노인들. 이 현실은 골목이나 재래시장을 조금만 돌아보아도 알 수 있다. 후미진 동네에는 영어 상호가 거의 없다. 국어시간에 암송하던 저 한글창제의 정신, 즉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이런 전차로 어린 백성이 니르고저 할 빼이셔도 마참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놈이 하니다. 내 이를 어여삐 녀겨 새로 스물여덟자를 맹가노니”라던 세종대왕의 ‘어여삐’ 여김은 다 어디 갔을까. 더불어 소수자, 약자의 정체성 정치의 약진은 엘리트의 것만이 아닌, 무식을 부끄러워하며 뒤로 숨는 또 다른 하위주체에게도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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