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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 힘이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힘을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자. 힘은 권력이기도 하니까. 그래서일까, 모든 부모는 자식이 명문대에 가서 많은 것을 배우기를 원한다. 그들이 아는 것만큼 권력을 가질 테니까 말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노동이 육체노동보다 더 강한 권력을 지니게 되는 이유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안다는 것은 권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동시에 권력을 지닌다는 것은 알게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생각지도 못했을 온갖 비밀들을 대통령은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만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비밀들이 새나갈 때, 그만큼 권력도 새나가는 것일 테니까. 그러니 권력을 둘러싼 투쟁의 백미는 아무래도 ‘아는 것’과 관련된다고 하겠다. <손자병법>에서도 쓰여 있지 않은가. ‘지피지기, 백전불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독재자들이 언론 탄압과 검열에 사활을 걸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특히 권력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사안에 대해서는 더 노골적이다. 과거 독재시절 검열로 아예 신문 기사가 통으로 시커멓게 칠해져 나오는 사태, 혹은 동아일보의 경우 광고마저 중단시켜 신문사를 고사시키려는 만행은 이미 하나의 전설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같은 제도적 장치이든지, 아니면 언론사 사주를 친정부 인사로 임명하는 것과 같은 은밀한 방법을 동원하여, 권력은 국민들에게 알 권리 자체를 무력화시키려고 한다. 물론 이런 야만적이고 반민주적인 책동은 권력의 부정의와 부패 정도에 따라 커지기 마련이다. 만일 언론사를 통제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권력이 아는 것을 독점할 수만 있다면, 권력은 신성불가침의 권좌에 앉게 될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제 검열과 탄압만으로 아는 것을 독점하거나 농단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해버렸다. 이제 모든 국민이 잠재적으로 기자인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진을 찍고 기사를 작성할 수 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의 기사를 실시간으로 세계 어느 곳이나 전송할 수 있다. 그들이 손에서 떼려고 하지 않는 스마트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반정부 시위 현장에 공중파 방송국 기자들이나 유력 일간 신문기자들이 야유를 받거나 출입 제한을 당하는 볼썽사나운 풍경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미 오래다. 스마트폰으로 그들은 실시간으로 기사가 어떻게 쓰였는지 검색할 수 있고, 심지어 그 기사와 반대되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다른 시민의 트위터 등으로 손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지 않는다면, 그리고 아는 것을 독점하려는 권력으로부터 비밀을 빼내 국민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언론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민주언론에 대한 열망이 그렇게도 강한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국민의 스마트폰이 신문을 제작하고 신문을 구독하는 공간이자, 동시에 방송을 제작하고 방송을 보는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신문사와 방송사는 없어도 그만인 셈이다. 돌아보라. 심지어 이제는 기자들이 개인 블로그나 SNS에 실려 있는 정보를 기사로 옮기기까지 하지 않는가. 권력과 체제 입장에서는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온 국민을 상대로 검열과 탄압을 시행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아는 것이 힘이다”. 체제가 어떻게 이 자명한 테제를 거역할 수 있다는 말인가. ‘궁즉통’이라고 했던가. 곤궁하면 살 길을 찾게 되는 법이다. 이제 권력은 ‘알지 못하게 하는 방식’을 버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떻게 모든 국민의 스마트폰을 검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권력은 묘수 하나를 마련했다. 그것은 ‘너무 많이 알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신문사나 방송사든지 아니면 스마트폰의 블로그나 SNS든지 체제의 치부를 드러내는 기사가 소개되면, 신속하게 수많은 기사들, 충분히 원초적이고 자극적이어서 국민의 시선을 충분히 끌만한 기사들을 신속하게 개개인의 스마트폰으로 합류시켜서 자신의 치부를 가리는 방식이다. 위험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못하도록 다른 수많은 현란한 것들을 보여주어 아이의 정신을 빼놓을 때 어머니들이 자주 쓰는 기법이기도 하다.

 

일러스트 _ 김상민

▲ “자극적 기사로 쟁점 희석에 맞서
그 쟁점들을 쓰고 또 쓰라
그것이 진정한 언론인의 척도다”

지금 심각한 문제로 온 국민이 인식하고 있는 4대강 사업의 문제점도 당시 이명박 정권 때에도 실시간으로 국민들에게 다 알려진 사실이었다. 4대강 주변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나 시민단체들이 스마트폰을 통해 어떻게 4대강이 녹차 라떼가 되어가고 있는지, 영상과 글로 이미 가상공간에 올려놓았다. 그렇지만 이 충격적인 기사는 권력과 권력에 직·간접적으로 지배되고 있던 언론사나 주요 포털사이트에 흘러넘친 다른 기사들, 유명 연예인의 스캔들도 좋고 해묵은 남북대립 기사도 좋고, 아니면 프로스포츠 관련 기사도 좋다. 녹차 라떼로 변질된 4대강으로부터 국민 시선을 돌릴 수 있는 것이라면, 체제나 보수 언론은 닥치는 대로 기사들을 가상 공간에 쏟아부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이 부각되는 것은 현 정권의 무엇을 가리기 위해 그런 것인지 의심해볼 만한 일이다.

신문과 방송에 종사하는 언론인들은 지금 심각한 자괴감에 빠져 있다. 가장 빠르고 신속하게 국민이 알아야만 하는 일을 기사나 방송으로 보내는 임무를 이미 스마트폰에 빼앗긴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종편방송과 수많은 인터넷 방송과 인터넷 신문이 생기면서, 참담한 생존 경쟁에 모든 언론사들이 내던져진 지 오래다. 그러니 생존을 위해서라도 국민의 시선을 하나라도 끌어들이기 위해서 계속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를 쏟아낼 수밖에 없다. 물론 팩트를 다루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제 언론인과 연예인의 차이가 무엇인지 헛갈린다는 자괴감이 도사리고 있다. 한때는 권력이 가장 두려워했던 기자가 이제는 사회적 쟁점을 희석시키는 자극적인 기사들을 쏟아붓는 자의반타의반 체제의 수호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권력이 독점하려는 ‘아는 것’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역할을 해야만 한다. 그것도 신속하고 정확하게 말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너무나 많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가 정말 국민이 알아야 할 것을 희석시키는 시대다.

바로 이 지점이다. 이제 언론은 ‘신속하고 정확하게!’라는 표어를 버려야만 한다. 아무리 신속하고 정확해도 국민이 가진 스마트폰을 물리적으로 따라가기 힘드니까 말이다.

이제 민주언론을 표방하는 언론인이라면 새로운 표어로 무장해야만 한다. ‘끈덕지고 집요하게!’ 그렇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들의 급류에 휩쓸려갈 것 같은 중요한 기사를 그렇게 허망하게 쓸려가지 않도록 ‘끈덕지고 집요하게’ 붙잡아야만 한다. 켜켜이 쌓이는 새로운 기사들 속에 먼지를 털어내듯 우리 국민이 알아야만 하는 쟁점을 꺼내서 ‘끈덕지고 집요하게’ 기사를 쓰고 또 써야만 한다.

그렇다. 진정한 언론인의 능력은 그가 얼마나 ‘끈덕지고 집요했는지’에 의해서만 측정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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